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시기 주류 업계는 큰 변화를 맞았다. 사람들의 만남이 금지됐기 때문에 혼자서 술을 마시는 것이 생활로 자리 잡았다. 특히 이 경우 소주나 맥주 등 흔히 먹던 술이 아니라 위스키나 와인과 같이 가격이 높거나 도수가 높아 평소에는 접하기 힘든 술의 판매량이 늘었다.
그런 추세는 코로나19 대유행 전후로 지속됐다. 위스키의 판매량이 늘어난 것. 그런 가운데 국내 주류업계도 이러한 경향에 맞춰 새로운 위스키가 주목 받기 시작했다. 바로 쌀을 기반으로 증류한 술을 오크통에 보관한 ‘라이스 위스키’, 일명 ‘쌀스키’ 또는 ‘오크통 숙성 소주’다.
‘라이스 위스키’는 이미 가까운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 생산되고 있다. 단순히 자국 소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위스키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서구권 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특히 일본과 중국은 ‘라이스 위스키’에 대해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리려 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아직 멀다. ‘라이스 위스키’에 대한 정의는 물론이고 맛과 향, 용기, 보관, 유통 등 전반적으로 아직 미흡하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도 하루라도 빨리 ‘라이스 위스키’의 표준을 정립해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쌀 소주가 위스키로… 글로벌 시장의 규제 틈새 노리는 일·중
현재 일본의 소주 업체들은 오크통에 숙성한 쌀 증류주를 ‘라이스 위스키’라는 이름으로 미국과 유럽 시장에 적극적으로 수출하고 있다.
EU 법령에 따르면 ‘곡물 증류주를 나무통에서 3년 이상 숙성하면 위스키로 판매할 수 있다’는 점을 파고든 것이다.
또 호밀 위스키, 밀 위스키, 콘 위스키 등이 법적으로 제정돼 있는 미국 시장에도 일본 업체들은 라이스 위스키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고 있다.
여기에 최근에는 중국 업체들까지 가세하면서 ‘쌀로 만든 위스키’는 이미 전 세계 위스키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는 형국이다.
■‘기후의 역설’…포기했던 한국 위스키 산업의 재발견
현재 일본과 중국이 전 세계 위스키 시장에 라이스 위스키로 공략에 나서고 있지만, 한국도 위스키 산업에 도전한 적이 있다.
다만 당시 위스키 산업에 대해 많이 알려지지 않았으며, 위스키에 대한 대중의 인식도 높지 않았다.
특히 한국은 스코틀랜드와 비교해 연교차가 매우 크다. 그래서 오크통에 보관한 술이 공기 중으로 사라지는 증발량(Angel’s Share)도 상대적으로 스코틀랜드보다 많다.
스코틀랜드의 연간 증발량이 1~2% 수준인 데 반해 한국은 10%를 훌쩍 넘기기 일쑤였다.
당시 이에 대한 조사나 연구가 부족했고, 업계에서 증발량에 대한 인식도 ‘손실’로 보면서 위스키 산업이 자리를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현재 위스키에 대한 연구와 조사가 많아지고 업계 인식이 바뀌면서 증발량을 ‘손실’이 아니라 ‘숙성의 가속도’로 해석하면서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열대 기후를 극복하고 세계적 위스키 반열에 오른 대만의 ‘카발란’이나 스코틀랜드보다 증발량이 2배 높은 일본 위스키의 성공이 이를 증명한다.
실제로 극심한 연교차는 오크통의 수축과 팽창을 반복시켜 나무의 풍미를 단기간에 응축해낸다. ‘다름’이 곧 ‘특별함’이 되는 시대가 온 것이다.
■이미 시작된 한국의 ‘오크 숙성’ 열풍…시장은 이미 뜨겁다
이러한 흐름에 발맞춰 국내 주류 시장에서도 오크통에 숙성한 프리미엄 증류식 소주들이 쏟아져 나오며 ‘K위스키’의 토양을 다지고 있다.
‘화요XP’를 시작으로, ‘마한오크’, ‘브라운 아울’, ‘모월 인 오크’, ‘수록’, ‘미라온’ 등이 쌀을 기반으로 한 고품격 오크 숙성주 시장을 이끌고 있다.
쌀뿐만이 아니다. ‘시인의 바위’(밀) 같은 곡물 증류주부터 ‘추사40’(사과), ‘고운달’(오미자), ‘문경바람’(사과) 등 과실을 기반으로 한 증류주들까지 많은 사랑 받으며 한국형 숙성 증류주 시장은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해진 상태다.
오크 숙성 소주가 잘 되기 위해서는 ‘라이스 위스키’라는 명확한 카테고리가 국내에서 확립돼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세계 시장에서도 ‘싱글 몰트 위스키’와 또 다른 ‘싱글 라이스 위스키’라는 한국만의 카테고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정의하는 자가 시장을 지배한다”…한국산 위스키의 과제
마침 전 세계적으로 ‘라이스 위스키’에 대한 명확한 법적 정의나 기준이 없다.
미국 규정에도 밀, 옥수수, 호밀 위스키는 명시돼 있지만 쌀 위스키는 공백으로 남아 있다.
전문가들은 지금이 한국이 나서야 할 골든타임이라고 입을 모은다.
주류문화칼럼니스트 명욱 교수는 “스코틀랜드가 1909년 위스키의 정의를 내림으로써 100년 넘게 종주국 지위를 누렸듯이, 우리나라도 ‘라이스 위스키’의 기준을 세계 최초로 수립한다면 시장의 판도를 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룹 방탄소년단(BTS)과 영화 ‘기생충’이 문화 한류를 이끌었듯, 이제는 술도 그 정점을 찍을 수 있는 시기가 왔다”고 설명했다.
단순히 서구의 위스키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우수한 쌀과 역동적인 기후가 빚어낸 ‘코리안 싱글 라이스 위스키’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명 교수는 코리안 라이스 위스키에 대해 몇 가지를 제안했다.
우선 미국식 위스키 기준을 참고해 해당 곡물의 함량이 51% 이상인 경우 해당 곡물 명칭을 호칭에 쓸 수 있게 하되, 오직 한 곳의 증류소에서 국산 쌀 100%로 만든 것에 있어서는 ‘싱글(Single)’이라는 호칭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했다.
숙성 기준은 EU의 기준인 3년 이상 나무통 숙성을 제시했다.
즉, 오직 국산 쌀로 만들어 3년을 나무통에서 숙성시키면 ‘코리안 싱글 라이스 위스키’라고 불릴 수 있다는 것이다.
명 교수는 “무엇보다 원료가 국산 쌀이어야 한다는 점을 통해 희소성을 확보하고 지역 농업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영화를 발명한 것은 프랑스이며 위스키의 증류 기술은 이슬람의 연금술에서 왔다”며 “기술의 기원이 어디든 이를 문화와 제도로 완성하는 국가가 종주국이 된다. 이제 한국 주류 산업은 단순한 제조를 넘어 글로벌 스탠더드(전 세계 표준)를 설계하는 ‘액체 한류’의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