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방산업계의 ‘큰손’으로 꼽히는 폴란드가 기로에 섰다. 러시아의 군사적 위협이 가중되는 가운데 유럽연합(EU) 역내에서 생산된 무기 도입 비중을 늘려야 한다는 목소리와 한국 등이 만들어내는 첨단 무기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맞서고 있다. 여기에 친(親)EU 기조의 정부와 반(反)EU 성향이 짙은 대통령의 견해차까지 더해져 혼란이 커지는 모양새다.
27일(현지시간) AFP, 로이터 통신 등에 따르면 폴란드 의회는 EU 무기 공동 구매 프로그램에 따른 대출금 440억유로(약 75조원)의 사용에 관한 법률안을 가결했다. 해당 프로그램은 유럽 자강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흔히 ‘세이프’(SAFE)로 불린다. 이는 EU 예산을 담보로 무기 공동 구매에 최대 1500억유로(약 256조원)까지 낮은 이자로 대출해주는 것이 핵심이다.
다만 유럽산 무기를 많이 구매하라는 이른바 ‘바이 유러피안’(Buy European) 조건이 달려 있다. SAFE 프로그램 자체가 EU 역내 생산·조달을 우선해 수입 의존을 줄이고 자립을 강화하려는 취지이기 때문이다.
현재 폴란드 의회 다수파는 2014∼2019년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을 지낸 도날트 투스크 총리가 이끄는 정당과 그 연합 세력으로, 친유럽 색채가 매우 강하다. 투스크 총리 측은 “폴란드의 국방력 강화를 위해 EU의 자금이 꼭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반유럽 민족주의 성향이 짙은 우파 야당 법과정의당(PiS) 등은 무기 구입에 관한 폴란드의 정책 결정에 EU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할 것이란 점을 들어 반대한다. 이들은 폴란드군이 쓸 무기 공급처를 EU 역내로 제한하는 것 또한 국익에 어긋난다고 지적한다.
폴란드는 국민 직선으로 뽑힌 대통령과 의회가 선출한 총리가 권력을 나눠 갖는 이원집정제 정부 구조다. 총리의 권한이 더 강하긴 하나 외교·국방 분야에선 대통령의 존재감도 만만치 않다. 그런데 현재 폴란드 대통령은 우파 민족주의 역사학자 출신의 카롤 나브로츠키 대통령이다. 그는 비록 무소속이긴 하나 대선 과정에서 PiS의 지지를 받았다.
한마디로 대통령과 정부의 정치적 지향점이 서로 다른 ‘한 지붕 두 가족’ 체제인 셈이다.
나브로츠키 대통령은 PiS와 마찬가지로 SAFE 프로그램에 의한 EU 역내 무기 구매에 비판적 태도를 취해 왔다. 대통령실 관계자는 무기 공동 구매 관련 법안의 의회 통과 직후 언론 인터뷰에서 “사실상 EU 역내에서 무기를 조달하라는 조건이 붙은 자금은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는 데 필요한 첨단 장비 구매를 제한할 것”이라며 “한국 등으로부터 무기를 사들이는 데 있어 폴란드의 손발을 묶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같은 논리에서 폴란드가 미국산 무기를 구입하는 것도 어려워질 전망이라고 밝혔다. 나브로츠키 대통령은 지난 2025년 대선 과정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를 받은 바 있다.
그 때문에 일각에선 나브로츠키 대통령이 의회를 통과한 무기 공동 구매 관련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것이란 관측을 내놓는다. 다만 투스크 총리는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법 제정이 중단되면 폴란드가 입을 손실이 막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