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비전이 결여된 힘의 강조는 위험하고, 힘의 뒷받침이 없는 평화론은 공허하다. 이재명 대통령이 취임 후 첫 3·1절 기념사를 통해 평화·공존·공동번영의 비전을 제시하는 적극적 대북 메시지를 발신했다. 지난해 8·15 경축사 때처럼 북한 체제 존중과 흡수통일 부인 의사를 밝히며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겠다고도 강조했다. 특히 북한이 반발했던 대북 무인기 침투사건과 관련해 직접 재발방지, 철저한 진상규명, 제도적 장치 마련도 약속했다. 반면 ‘핵 없는 한반도’가 명시됐던 지난해 8·15 경축사와는 달리 비핵화는 일언반구 언급되지 않았다.
이 대통령 말마따나 평화·공존·공영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이다. 문제는 현실화할 구체적 전략과 이를 지탱할 힘이 없다면 이상론에 불과하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남북 대화는 거절하면서 핵보유국 지위를 노려 북·미 대화를 의도하고 있음은 세상이 다 안다. 우리는 국제 질서를 움직일 힘이 없지만 미국은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이란 공격을 목도한 북한은 이제 핵 보유에 더 집착할 것이다.
이 대통령이 강조했듯이 세계는 힘의 논리에 좌우되고 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미·이스라엘의 이란 공격, 중국의 세력 팽창은 법·규범이 아니라 힘의 논리가 관철되는 냉정한 국제 질서를 보여준다. 한반도 정전체제를 유지한 것도 정전협정문이라는 종잇조각이 아니라 힘의 균형이다. 정전체제는 물론 평화체제도 힘이 있어야 가능하다. 한·미가 갈등 끝에 연합야외기동훈련 규모를 작년 절반 수준으로 축소한다고 하니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평화·공존·공영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목표이지만, 국가 생존이 걸린 힘의 배양 역시 절대 양보할 수 없다. 평화·공존·공영론은 힘이 바탕 안 되면 공염불에 불과하다.
이 대통령이 엄혹한 국제환경에서 셔틀 외교 지속 등 한·일 협력을 강조한 것을 환영한다. 다만 일본의 군사력 강화가 가져올 파장이나, 다카이치 사나에 정권의 ‘우익본색’ 표출 가능성에 대비할 필요는 있다. 결국 한·일 관계에서도 힘이 필요한 것이다. 대북 관계나, 대일 관계나, 관계 개선 노력과는 별개로 국가의 생존성을 높이기 위한 힘을 키우는 투트랙(two track) 전략의 지혜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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