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한편의 K-뮤지컬이 영국 무대에 선다. 좀비 바이러스 창궐로 문명이 붕괴한 시대에 서울 신림동 B-103 방공호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생존자가 주인공인 ‘더 라스트맨’이다. 2021년 대학로에서 처음 선보인 작품인데 5월 8일부터 6월 6일까지 런던 사우스워크 플레이하우스 엘리펀트에서 공연된다. 세계 뮤지컬 1번지인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 진출을 꿈꾸는 신작이 거쳐가는 명망있는 극장이다.
신림동 정서를 그대로 가져가는 이 작품의 현지화를 도맡는 건 드라마터그(극작 및 각색 담당)를 맡은 제스로 컴튼. 연극 ‘벙커 트릴로지’, ‘카포네 트릴로지’ 등으로 국내에도 이름을 알린 영국 극작가·연출가·프로듀서다. 그는 지난달 23일 한국 언론과 만나 “한국적 디테일과 사회적 맥락을 영국 관객에게 어떻게 자연스럽게 전달할지 고민이 컸다”며 “신림동이란 공간이 가진 ‘성공 신화’와 ‘사회적 압박’의 분위기를 직접 체험하며, 이를 무대에 녹여내기 위해 노력했다”고 설명했다.
“가족의 기대와 사회적 압박 속에 도시에서 살아가는 청년들의 고충은 런던, 서울, 뉴욕 어디서나 통하는 보편적 주제입니다. 이야기가 구체적이고 개인적일수록 오히려 더 보편적으로 관객에게 다가갈 겁니다.”
컴튼은 작품이 다루는 청년 세대의 사회적 고립과 소외는 영국에서도 점점 심각해지는 문제여서 영국 관객들의 공감을 살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젊은 남성들이 온라인 게임 등에서만 커뮤니티를 형성하며 사회로부터 고립되는 현상이 영국에서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뮤지컬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로 웨스트엔드에서 권위있는 올리비에상까지 받은 영국 현역 연출가로서 컴튼은 양국 차이점에 대해서도 뚜렷하게 설명했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한국과 달리 영국은 ‘행간’에 더 집중한다는 것.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영국 관객들은 인물이 감정을 직접적으로 토로할 때 오히려 불편해합니다. 슬픔의 표현도 마찬가지예요. 한국 공연을 보면 슬픈 장면에서 배우가 우는 것을 관객이 기대하는 느낌이 있는데, 영국에서는 배우가 울면 관객은 오히려 울지 않습니다. 슬픔이 차오르는데 꾹 참고 있을 때, 그때 영국 관객이 눈물을 흘립니다.”
무대위 시각적 은유나 소품의 상징 등을 읽어내는 능력도 한국 관객에 훨씬 더 탁월하다고 한다. 그는 “서양 작품이 한국에 들어오는 경우는 많지만, 그 반대는 거의 없었다”며 “이번 무대가 그 역방향의 새로운 통로를 열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이어서 적극 응원하고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K-뮤지컬의 가능성에 대해선 원작이 풍부하다는 점을 짚었다. 영·미에선 유명 소설이나 영화 등을 무대화하는데 집중하는 반면 한국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무에서부터 개발하고 관객이 이를 받아들여 성공하는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영·미권은)솔직히 말하면 게으른 방식으로 재탕하는 경우도 많아요.”
K-뮤지컬 해외 진출의 성패도 ‘독창성’에 달려있다는 설명이다. “영국 고전 문학을 무대에서 보고 싶다면 저는 아마 영국의 전통적인 극단 작품을 기대할 것 같아요. 한국에서 온 작품이라면, 한국적인 것, 한국 문학이나 한국의 철학이 담긴 콘텐츠를 보고 싶습니다.”
넷플릭스가 영화산업을 위기로 내몬 시대지만 연극·뮤지컬의 앞날에 대해선 비교적 낙관적이다. “공연은 라이브여야 합니다. 그건 영상으로 절대 대체될 수 없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집에서 즐길 수 있는 엔터테인먼트가 점점 많아지고, 편하고 저렴하니까 관객을 극장으로 끌어내는 것 자체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공연은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국에서도 빈번하게 이뤄지는 스크린 스타의 연극 진출에 대해선 쓴소리했다. “한 가지 바뀌었으면 하는 건, 질 낮은 상업적 작품이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상업적인 작품 자체가 나쁜 건 아닙니다. 하지만 돈이 된다는 이유만으로 퀄리티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작품들, 그게 정말 슬픕니다. 거기다 할리우드 스타 하나 캐스팅해놓고 900달러짜리 티켓을 파는 현상도요. 그런 것들이 바뀌었으면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