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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비운의 쿠르드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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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르드족은 한 번도 독립국가를 설립하지 못한 비운의 민족이다. 이들은 튀르키예·이라크·이란·시리아 등 중동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흩어져 살아 ‘중동의 집시’라 불린다. 중세 십자군전쟁의 영웅 살라딘을 배출한 민족이기도 하다. 하지만 16세기 오스만튀르크에 복속된 뒤로 끊임없이 독립투쟁을 벌였지만, 강대국들의 이해충돌과 주변국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했다. ‘쿠르드족에게는 친구는 없고 산만 있다’는 오랜 속담에는 떠돌이 민족의 절절한 슬픔이 배어 있다.

쿠르드족의 역사는 수난사 그 자체다. 1970년대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이라크를 약화하기 위해 독립 열망이 가득한 쿠르드족에게 무기와 돈을 대며 반란을 부추겼다. 하지만 이란·이라크가 국경분쟁을 끝내자 CIA는 가차 없이 손을 뗐다. 그러자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 쿠르드족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쿠르드 지도자가 미국에 “파멸을 막아달라”라고 애원했지만, 당시 미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는 “정보기관의 공작은 자선사업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1980년대 이란·이라크 전쟁 때도 쿠르드족이 이라크 북부 산악지대에서 게릴라전을 벌였는데 4년에 걸친 후세인의 잔혹한 복수로 18만명이 숨지거나 실종됐다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도 악연이 깊다. 쿠르드족은 2014년부터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세력 이슬람국가(IS) 격퇴전에 뛰어들어 미군을 대신해 피를 흘렸다. 전사자가 1만1000명에 달했다. 미국과 가장 강력한 동맹이 됐으니 독립국 건설의 꿈에 다가서는 듯했다. 하지만 IS가 괴멸하자 트럼프는 2019년 10월 돌연 시리아 주둔 미군 철수를 명령했다. 쿠르드족은 졸지에 ‘토사구팽’당했다. 오랜 앙숙인 튀르키예 군이 쿠르드 지역을 초토화했지만 트럼프는 “막대한 돈과 장비를 줬으니 계산은 끝났다”며 모른 척했다.

쿠르드족이 다시 트럼프와 손잡고 미국·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에 참전하는 모양이다. 외신에 따르면 수천 명의 전투원이 국경을 넘어 이란에서 지상작전을 시작한 것으로 전해진다. 트럼프가 미군 대신 쿠르드족을 ‘대리 지상군’으로 활용하려는 의도로 읽힌다. 이번에도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트럼프 외교노선의 희생양이 되는 거 같아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