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김마리아가 1944년 3월13일 잦은 옥고와 병마에 시달린 끝에 향년 54세로 별세했다. 그러나 그의 부고 기사는 어느 신문에도 보도되지 않았다. 당시 ‘매일신보’, ‘경성일보’ 등 조선총독부 기관지를 제외한 모든 신문이 폐간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몇몇 지인을 빼놓고는 알 수 없었다.
필자가 김마리아의 이름을 처음 접하였을 때는 김구의 모친 곽낙원과 함께 그의 독립운동을 소개한 1976년 중학교 3학년 1학기 국정 국어교과서를 배우는 시점이었다. 그 단원도 새 학기가 시작되는 3월에 맞추어 배치한 게 아닌가 싶다. 당시만 하더라도 학생들에게 여성독립운동가는 오로지 ‘유관순 누나’였다. 3·1절이 가까이 오면 신문과 방송은 유관순 열사 이야기를 쏟아냈고 음악수업 시간에 배운 ‘유관순’ 노래가 뇌리를 자주 스치곤 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기성세대는 물론 필자 또래 학생들은 유관순과 함께 만세시위에 참여한 수많은 여학생을 비롯한 숱한 여성들의 존재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유관순만 유일한 여성독립운동가였다는 착각까지 하였다. 따라서 이 단원에서 배어 나오는 김마리아의 열정과 헌신은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더욱이 그는 1919년 2월8일 도쿄 하늘에서 울려 퍼진 유학생들의 독립선언 자리에 참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귀국하여 3·1만세 시위를 끌어내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는 시위 학생들의 배후 조종자로 몰려 갖은 폭력과 수모 끝에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고 옥고 때문에 한자리에 30분을 못 넘기는 신체적·정신적 고통 속에서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회장으로서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적지 않은 악연도 따랐다. 그가 임시정부 군자금 지원에 힘쓰던 시절, 정신여학교 동기가 밀고하여 비밀조직이 드러났으며 누군가는 조선임전보국단 등의 친일단체에 참가하여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었다. 이런 절친 여성 동지들의 변절과 배신 앞에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그럼에도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다”고 외친 그에게도 평생 잊지 못할 화양연화(花樣年華)가 있었다. 어느 역사학자의 자료 발굴 덕분에 이들 사이의 연애담이 세간에 소개되어 회자하고 있듯이 1923년 상하이에서 만난 사회주의자 김철수와의 사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와 조선 사회주의운동의 맹장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사상의 차이가 아니라 김철수가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었기 때문이다. 훗날 김철수는 평양기독병원에서 병사한 김마리아를 생각하며 늘 미안해하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는 분단의 고통 속에서 두문불출하며 1986년 고향 전북 부안에서 생을 마감했다. 비록 그들의 사랑은 현실이라는 장벽 앞에 결실을 보지 못했지만 그들의 삶은 전혀 헛되지 않았다. 그들의 열정과 헌신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이 온갖 고난 속에서도 국가 기틀을 마련하지 않았는가.
삼월의 하늘을 우러러보며 푸른 하늘을 그리워한 ‘유관순 누나’ 아니 ‘유관순 언니’를 여전히 불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영화 한 편에 부풀어 올랐다가 금세 사그라지는 시류와 무관하게 지속적이고 체계적으로 여성독립운동가들을 발굴하고 선양할 필요가 있다. 무명 여성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기억은 결코 과거에 머문 게 아니라 도약할 수 있는 오늘의 디딤돌이고 미래를 밝혀 주는 등불이기 때문이다.
김태웅 서울대 교수·역사교육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