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법재판소가 헌법소원 사전심사 단계에서 결정 이유를 적지 않고도 청구를 기각할 수 있게 하는 법안이 여당 주도로 발의됐다. 확정판결에 대한 헌법소원을 의미하는 ‘재판소원’ 제도가 시행되며 사건 접수 급증이 우려되자, 무분별한 청구를 방지하고 헌재가 중대한 사건에만 집중할 수 있게 한다는 목적이다. 대법원 법원행정처는 재판소원 시행에 대응하기 위해 ‘후속조치 연구반’을 꾸리는 것으로 16일 확인됐다.
헌재는 시행 첫날인 12일부터 전날까지 재판소원을 모두 44건 접수했다고 밝혔다. 전자접수 31건, 방문접수 5건, 우편접수 8건이다. 여기에 이날 오후 6시까지 전자헌법재판센터상 재판소원 18건이 추가로 확인돼 닷새간 누적 62건이 접수됐다. 하루에 10여건꼴로 재판소원 심판청구서가 헌재로 제출되고 있는 셈이다.
더불어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10일 헌재 지정재판부가 명백히 이유 없는 청구를 각하뿐 아니라 기각할 수 있게 하고 기각 결정에 이유를 적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는 헌법재판소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지정재판부에서 재판관 전원일치 의견으로 명백히 이유 없는 헌법소원 청구는 기각하고 그 이유도 생략하도록 해 지정재판부와 전원재판부 모두 중요 사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게 취지다.
현행 헌재법은 헌법소원 본안 심리를 담당하는 전원재판부 회부 전 헌법재판관 3인으로 구성된 지정재판부가 청구의 적법요건이 없는 경우 30일 이내 전원일치 의견으로 ‘각하’ 결정만 할 수 있도록 정하고 있다. 청구의 요건은 갖췄지만 다툴 가치가 명백히 없는 경미한 사건이라도 기각할 수 없고, 전원재판부에 회부해야 하는 것이다. 적법요건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는 다른 법률에 따른 구제절차를 모두 거치지 않았거나, 청구 기간이 지났거나, 변호사를 대리인으로 선임하지 않았거나, 청구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되는 때다.
하지만 법조계에선 “기각 이유를 생략하면 국민의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하게 될 것”이란 우려가 제기된다. 국민 권리를 위해 시행된 재판소원 제도에도 역행한다는 것이다.
한 부장판사는 “헌재는 ‘단심제’ 기관으로, 당사자는 헌재 결정에 대한 불복이 불가능하다”며 “단심제에서 청구가 기각돼도 그 이유가 결정문에 없으면 내 청구가 기각된 까닭을 알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다른 법조계 관계자는 “본안 심리 없이 상고를 기각하는 ‘심리불속행 기각’ 제도를 두고 판결 사유를 적지 않는 게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다’는 비판이 계속됐는데, 헌재도 같은 비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어 “대법원 판결은 당사자가 1·2심을 거쳐 판단 이유를 받아보기라도 했지만 헌재는 한번 결정으로 끝 아니냐”고 반문했다.
장영수 고려대 명예교수(법학전문대학원)는 “사전심사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 자체가 올바른 방법은 아니다”라며 “대법원에서 심리불속행으로 사건 많이 거르니까 재판에 대한 불만이 커져 재판소원까지 온 건데, 사전심사에서 그렇게 하면 ‘그럴 거면 재판소원 왜 하자고 했느냐’는 이야기가 안 나오겠느냐”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독일과 스페인처럼 재판소원까지 하려면 전원재판부를 늘리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행정처는 내부 게시판인 코트넷 공지를 통해 “재판소원 시행에 따른 실무상 쟁점과 제도 운영 방안 등을 법관들과 함께 연구하기 위해 ‘재판소원 후속조치 연구반’을 구성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재판소원은 사법제도 전반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재판소에 의해 법원의 재판이 취소된 이후의 후속 재판절차와 방식, 재판소원 관련 가처분을 포함한 헌법재판소 결정이 사법절차나 법률관계에 미치는 영향, 재판소원 심리 과정에서 법원과 관련된 실무적 절차 등에 관하여는 아직 충분한 연구와 검토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