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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완전한 설계도, 사람의 온기 [이상권의 카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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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매된 임윤찬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라이브 음반은 바흐에 낭만적 숨결을 불어 넣었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다만, 변주를 매번 새로 쓰는 문장처럼 들리게 하는 그의 상상력이 작품의 건축적 통일성을 흐릴 수 있다는 시선이 뒤따라 붙었다. 반복부의 장식과 옥타브 전위를 두고 소환되는 근거는 늘 같다. ‘작곡가의 의도’. 이 물음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전제가 깔려 있다. 악보가 곧 작품이라는 믿음이다.

다만 악보는 그 자체로 완결된 음악은 아니다. 악보는 연주를 통해 비로소 실현되는 지시문에 가깝다. 연주는 복제가 아니라 수행이며, 선택과 해석의 연속이다. 작곡 당시의 악기와 그 음색, 연주 공간의 잔향, 관습으로 공유되던 아티큘레이션과 장식 어법이 그 과정에 자연스럽게 개입한다. 한 음의 길이와 강세, 호흡의 지점, 프레이즈의 굴곡이 종종 악보 밖에 남겨지는 까닭이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 중인 임윤찬. 세계일보 자료사진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연주 중인 임윤찬. 세계일보 자료사진

작곡가의 의도를 논하려면, 먼저 그 의도가 보존된 문헌을 살펴야 한다. 자필 악보와 초판, 교정쇄와 개정판이 서로 어긋나는 일은 드물지 않다. 원전 악보는 유일한 진본이 아니다. 자료의 선택과 배제를 투명하게 드러내는 편집의 기록이다. 자필에 남은 수정과 삭제의 흔적 역시 하나의 문장이다. 의도란 순수한 원점이 아니라, 그 층위 속에서 읽히는 것이다. 작곡가가 머릿속에서 구상한 것, 종이 위에 남긴 것, 연주자와 청중이 소리로 재구성하는 것. 이 세 층위는 서로 가까워질 수 있을지언정 완전히 겹치지는 않는다. 작곡가는 내면의 소리를 기보법이라는 불완전한 그물로 옮기고, 연주자는 그 그물에 걸린 것과 빠져나간 것을 함께 읽는다. 그 간극을 지우려는 강박이 오히려 음악을 말린다. 악보에 적힌 것만이 의도의 전부라고 믿는 순간, 적히지 않은 것이 품고 있던 가능성까지 함께 닫힌다. 의도는 고정된 결론이 아니다. 텍스트가 허용하는 범위와, 그 범위를 지탱하는 규율의 묶음에 가깝다.

바로크 시대, 통주저음으로 쓰인 악보는 화성의 뼈대만 적어두고 어느 정도는 연주자에게 맡기는 밑그림이었다. 19세기에 접어들며 악보는 점점 촘촘해졌다. 베토벤은 메트로놈 숫자까지 지정했지만, 일부 템포는 비현실적으로 빨라 오류라는 시각이 지금까지 이어진다. 말러의 빽빽한 지시는 답보다 질문을 남겼고, 쇼스타코비치의 암호 같은 음형은 악보 바깥의 현실까지 함께 읽기를 요구한다. 악보를 문자 그대로 소리 내는 것만으로는 작품이 말하려 한 것의 절반에 머문다.

 

이상권 음악평론가
이상권 음악평론가

작곡가가 직접 남긴 음반은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녹음은 영원한 정답이 아니라 특정 시점의 한 번뿐인 해답이다. 악기와 기술, 체력과 시장의 조건이 그 결을 바꾼다. 1943년, 바이올리니스트 메뉴인이 바르토크 앞에서 그의 소나타를 연주하자 바르토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내가 죽고 한참 뒤에나 이런 연주가 나올 줄 알았다.” 어떤 작품은 작곡가의 손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숨을 얻는다.

연주자는 늘 갈림길에 선다. 당대의 조건을 복원할 것인가, 거장의 관행을 이을 것인가, 과거의 텍스트를 오늘의 언어로 다시 말할 것인가. 셋 중 어느 길도 나머지를 틀렸다고 말할 수 없다. 결국 남는 기준은 하나다. 그 선택이 음악 안에서 설득력을 갖느냐는 것이다.

악보는 완성된 건물이 아니라 읽는 이의 손을 기다리는 불완전한 설계도다. 같은 설계도를 펼쳐놓아도 누구의 손을 거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건물이 올라간다. 아무도 들어서지 않는 건물은 아무리 정교해도 빈껍데기일 뿐이다. 그리고 그 공간에 기꺼이 들어서서 끝까지 머물 것인지를 결정하는 몫은, 듣는 우리에게 있다.

이상권 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