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 ‘자매’(‘남쪽’에 수록, 허진 옮김, 다산책방)
어머니를 일찍 잃은 두 자매가 있다. 언니인 베티는 동생처럼 도시로 떠나고 싶었는데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집에 남았다. 쉰 살이 될 동안 결혼 시기도 놓친 채 몇십 년 동안 아버지의 속옷을 세탁하고 “변덕스러운” 그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챙겨주고 성질을 달래주었다. 손이 아름다웠지만 일하느라 엉망이 되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엄청난 해방감이 몰려왔다. 그가 성질을 부릴 때 던지는 접시 조각들을 줍지 않아도 되고 요리를 비롯해 베티가 하는 모든 일에 불만을 터트리는 소리를 더는 듣지 않아도 되니까. 이제 베티가 생각하는 좋은 삶이란 텃밭을 가꾸고 암소에서 우유를 짜고 일요일에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다.
동생 루이자는 일찍 도시로 떠나 부자처럼 보이는 외판원과 결혼해 남매를 두었다. 제 나이로 보이지 않는 얼굴을 가진 데다 아름다운 금발머리 때문인지 모두가 그녀에게는 친절을 베풀었다. 아버지조차 루이자가 집에 오면 꽉 끌어안은 다음 뒤로 물러서서 감탄하듯 바라보곤 할 정도였고. 베티와 달리 그녀는 아버지에게 “자상한 면”을 이끌어낼 줄 아는 딸이었으며 자기 모습에 감탄하며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사람에 속했다. 댄스파티에 갔을 때 파트너 없이 혼자 있는 언니에게 조언이라고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웃지 않도록 애써봐. 언니는 웃으면 너무 끔찍해.”
부모는 루이자에게는 아까운 게 없고, 베티에게는 그렇지 않았으며 “자매가 분필과 치즈만큼이나 전혀 딴판”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었다. 부모가 다 떠난 과수원이 딸린 농가주택은 베티의 소유가 되었으나 아버지는 유언장에 단서를 붙였다. 루이자가 살아 있는 동안은 이 집에 살 권리를 준다는. 루이자 가족은 6월마다 커다란 자동차에 짐을 가득 싣고 와 여름을 보내곤 했다. 그때마다 베티에게 각종 요리와 물품들을 차례대로 요구하면서. 올해는 온다는 소식이 없어서 저장해 둔 감자나 잼 등 아무것도 낭비하지 않으면서 혼자 여름을 보낼 수 있다고 안도했다.
루이자는 남편 없이 급작스럽게 찾아와 맞이하러 나간 언니를 보곤 “아, 베티!”라고 말한다. 마치 “이 집에 베티가 있어서 놀란 듯이”. 베티 혼자 검소하게 살던 집에 “칭찬을 듣기만 할 뿐 돌려주지 않는” 루이자와 혼자 놀 줄 모르고 과수원의 과일들을 아무렇게나 따버리는 두 조카가 베티의 방을 포함해 거리낌 없이 공간을 차지해 버렸다. 베티가 차려주는 음식을 감사히 여기지도 않으면서. 언니가 보기에 동생에게는 한 가지 단점이 있는데 두세 달을 지내면서도 생활비를 한 푼도 주지 않고 빵 한 덩어리 사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왜 이번엔 루이자의 남편은 오지 않았을까.
어느 비 오는 날, 남자 조카가 베티를 빤한 눈으로 보며 묻는다. “이모가 죽으면 이 집은 누가 가져요?” 베티는 충격에 빠졌고 눈물이 터질 것 같았다. 루이자가 자신에게 한 말도 떠올랐다. “뼈 빠지게 일하더니, 결국 원하던 걸 손에 넣었잖아.”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루이자와 조카들이 지금 왜 여기에 와 있는지, 어떤 목적을 갖고 왔는지. 자신을 무시하고 폭력적이었던 아버지를 견디면서 베티는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아버지가 던진 접시 조각을 줍는 그런 여자, 자신이 그게 전부는 아닌 사람이며 때에 따라서는 현명한 행동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정당한 자기 것”을 움켜쥐기 위해서는. 자신의 계획을 들키자 루이자가 언니에게 말한다. 유언장을 보라고, 자기는 여기서 지낼 권리가 있다고.
소설에서 인물이 갈등처럼 느껴지던 문제에 어떻게 하기로 결심하는 과정, 행동으로 옮기는 지점은 무척 흥미롭다. 베티는 정당한 자기 것이라면 움켜쥐어야 한다는 걸 아는 사람이므로 루이자에게 무슨 행동인가를 한다. 그러곤 문간에 서서 파랗고 멋진 아침을 내다보며 동생의 조언과 달리 “그 끔찍한 미소를 짓는다.” 클레어 키건이 쓰는 형용사는 정말 눈여겨봐야 한다. “끔찍한”을 이렇게 중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니. 그럼으로써 작가는 정당한 자기 것을 움켜쥐려고 현명한 행동을 하는 인물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게 아닐까.
조경란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