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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백악관에 들어선 콜럼버스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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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콜럼버스(1451∼1506)는 모국인 스페인은 물론 미국에서도 오랫동안 영웅으로 통했다. 1492년 10월12일 그가 이끈 선단이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한 것을 기념해 미국은 ‘콜럼버스의 날’(매년 10월 두 번째 월요일)을 국경일로 기려 왔다. 미 수도 워싱턴의 공식 명칭 ‘컬럼비아 특별구’(DC)에서 컬럼비아는 콜럼버스의 여성형 명사에 해당한다. 정작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본인이 상륙한 땅을 아메리카가 아닌 인도로 여겼다고 하니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도 없을 것이다.

‘신대륙 발견자’란 명성과 달리 콜럼버스는 값나가는 재물을 얻기 위해 북미 원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수탈했다. 오늘날 그가 뛰어난 항해사보다는 악랄한 식민주의자로 더 널리 기억되는 이유다. 2020년대 들어 미 전역에서 콜럼버스 동상이 파괴되거나 훼손되는 일이 잇따랐다. 진보 진영의 지지를 등에 업고 2021년 취임한 민주당 조 바이든 대통령은 ‘콜럼버스의 날’ 명칭을 ‘원주민의 날’로 바꿨다. 그러면서 콜럼버스를 겨냥해 “북미 원주민을 탄압하고 학살에 앞장선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바이든과 앙숙인 공화당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를 그냥 넘어갈 리 없다. 재집권 첫해인 2025년 10월 트럼프는 ‘콜럼버스의 날’ 부활을 선포했다. 당시 그는 성명에서 “최근 몇 년 동안 콜럼버스는 우리 역사를 지우고 영웅을 비방하며 유산을 공격하려는 악랄하고 무차별한 캠페인의 주요 표적이 되어 왔다”고 지난 바이든 행정부를 성토했다. 이어 “나의 지도 아래 그런 시대는 끝났다”며 콜럼버스를 향해 “진정한 미국의 영웅”이란 찬사를 바쳤다. 참으로 트럼프답다.

말로만 그친 것이 아니다. 지난 22일 백악관에 4m 높이의 콜럼버스 동상이 들어섰다. 2020년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인종 차별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때려 부순 콜럼버스 동상을 원형과 똑같이 만든 복제품이라고 한다. 트럼프는 콜럼버스의 원주민 인권 탄압 사실에는 눈을 감은 채 “우리나라 시민 모두는 그가 발휘한 불굴의 결단력에 영원한 빚을 지고 있다”고 상찬했다. 보혁 갈등이 정치권을 뛰어넘어 역사·문화 분야에서도 첨예한 것은 미국과 한국 공히 마찬가지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