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판타지/ 클라우스 테벨라이트/ 김정은 옮김/ 글항아리/ 6만8000원
독일 문학평론가 클라우스 테벨라이트가 파시즘의 뿌리를 ‘남성성의 병리’에서 찾은 이 책은 1970년대 후반 출간 이후 지금까지 학계와 사회 전반에서 논쟁을 불러일으켜온 문제작이다. 이번에 출간 50년 만에 한국어판으로 번역·출간됐다.
저자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 사회에서 활동했던 우익 민병대 조직 자유군단(프라이코어·Freikorps) 병사들의 기록과 문헌을 면밀히 분석해, 폭력과 성, 여성혐오가 결합한 남성적 상상력이 어떻게 정치적 파시즘으로 이어졌는지를 추적한다.
이 책이 충격적인 이유는 파시즘을 거대한 정치 구조의 산물이 아니라 개인의 감각과 신체, 그리고 일상적 상상력에서 출발하는 현상으로 해부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이 저작은 문화비평, 영화이론, 남성성 연구, 젠더 이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빠지지 않고 언급돼 왔으며, 최근 전 세계에서 극우 세력과 ‘극우적 남성성’이 부상하면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당신 말마따나 한 인간이기 이전에 몸과 마음을 다한 철도공무원이셨다. 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또한 무척 훌륭한 파시스트였다.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평소 매질을 혹독하고도 거리낌 없이 가하곤 하셨다. 나는 훗날 그것이 파시즘 교육의 첫걸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양가적이었다. 맞아도 싸다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달래주었다. 그것이 파시즘 교육의 두 번째 단계였다.”(6쪽)
저자는 서문에서 철도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기억을 통해 어린 시절부터 체화된 ‘파시스트적 남성성 교육’을 고백한다.
그가 분석 대상으로 삼은 집단은 자유군단의 젊은 군인들이다. 패전 이후 독일에서 좌파 혁명 세력이 확산되자, 퇴역 군인과 우익 폭력 집단이 기존 정치권의 묵인과 지원 속에 결집해 형성된 조직이 바로 자유군단이다.
이들은 저자의 말대로 ‘강철 같은 신념과 애국적인 열망으로 기꺼이 살해와 폭력에 가담했던’ 기해자들로, 1919~1920년 스파르타쿠스 봉기, 뮌헨 소비에트 공화국, 루르 지방의 ‘붉은 군대’ 봉기 등을 진압하는 데 투입됐다.
이후 독일 파시즘의 정치적 부상을 뒷받침했으며, 훗날 나치당 집권 이후 일부는 돌격대(SA)나 친위대(SS)로 흡수돼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핵심 역할을 맡게 된다.
저자는 파시스트 남성성의 문제를 연구하기 위해 7명의 군인 사례를 집중 분석한다. 이들이 어떤 대상관계를 형성했는지, 어떤 정서 구조를 지녔는지, 그리고 어떠한 방어기제를 통해 불안을 통제했는지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특히 프롤레타리아 여성과 공산주의 여성을 괴물로 묘사한 델마르 소령의 기록은 핵심 분석 대상이다. 그의 글에서 하층 계급 여성은 욕설과 폭력, 문란함의 집합체로 그려진다. 색싯집과 술집, 범죄와 공산주의는 하나의 세계로 뒤엉켜 있으며, 여성은 남성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존재로 상상된다.
이들에게 여성성은 ‘늪’이나 ‘진창’처럼 남성을 빠뜨리는 위험한 공간이다. 섹스를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혐오하는 이중 감정 속에서, 군인들은 스스로를 ‘강철 같은 존재’로 만들고자 한다.
저자는 이러한 남성성을 해부하듯 읽어내며 반복되는 상징을 포착한다. 여성의 몸은 ‘액체’, 남성의 몸은 ‘강철’로 표상된다는 점이다. 여성은 경계를 넘나들며 질서를 위협하는 흐름으로, 남성은 이를 차단하는 단단한 방어체로 그려진다. 이 상징 구조는 단순한 문학적 장치를 넘어, 병사들의 심리와 사회적 상상력의 핵심을 이루며 결국 폭력과 억압으로 귀결된다.
저자는 자유군단의 남성들에 관해 “모성이 제거되고 사회적 자아의 양육이 인위적으로 차단되며 욕망이 저해받은 남성은 특정한 자아로 만들어진다. 이들은 통합하고 생산하고 연대하고 확장하는 원형적 여성성을 위협으로 느끼며 공포에 질린다. 그래서 여성적인 모든 것을 몰아내려 한다. 해체와 분열의 공포에 사로잡힌 이들의 자아는 강한 결속과 위계를 부과해주는 폭력적 기관에 스스로를 투항하게 된다”고 분석한다.
이처럼 광적인 자발성으로 바치는 폭력은 국가 폭력, 여성혐오, 인종 말살로 이어진다는 것을 책에서 여러 예시로 보여준다.
이 책이 던지는 문제의식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한국 사회 역시 ‘여성혐오’와 ‘남성성의 위기’를 둘러싼 논쟁이 지속되고 있다. 온라인 공간에서 표출되는 극단적 혐오 발언과 젠더 갈등, 반복되는 성폭력 사건들은 저자가 분석한 ‘남성 판타지’의 현대적 변형으로 읽힐 수 있다.
14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과 실험적인 문체는 독자에게 적지 않은 부담을 준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한 역사 연구를 넘어, 오늘날에도 반복되는 남성적 폭력성과 권력 욕망을 제대로 비추는 거울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일독에 도전해볼 만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