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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문화] 새봄, 위대한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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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속 우유 따르는 여인처럼
세상 구원하는 건 평범한 존재
정성스레 반복되는 일상 속에
가장 숭고한 아름다움 깃들어

이 글은 내 책상 위 벽에 붙은 한 장의 명화 복제본에서 시작해야겠다. 지금은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러야 하는 봄밤이다. 원고 마감 시간이 임박했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낮에 아르코 미술관에서 간담회를 마치고 곧장 귀가해서 글을 쓸 작정이었다.

하지만 몇 해 만에 만난 시인들과 바로 헤어지기 아쉬웠다. 근처에서 저녁 먹자는 선배 시인의 제안이 반가웠다. 식당 창밖에는 하얗게 목련이 피고 있었다. 봄밤이었다.

김이듬 시인·서울대 강사
김이듬 시인·서울대 강사

새겨울, 새여름이란 말은 없는데 새봄은 왜 가능한지 알 것 같았다. 새로이 살고 싶었다. 우리 중 누구도 승용차가 없었지만, 기름값을 걱정했다. 나는 술잔을 비우지 않았다. 사람들의 온기에 녹은 나는 쉽게 그 자리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뭉그적거렸다.

집에 와서야 뭘 쓸지 고민했다. 책상 위에 붙여놓은 그림에 무심코 눈이 갔다. 명작 혹은 걸작이라고 인정받는 그림이다. 교황을 모델로 한 그림일까? 위대한 정치인을 모델로 한 그림일까? 위대하다는 건 뭘까? 크고 훌륭한 걸까? 인권 보호, 민주주의 수호를 명분으로 해도 전쟁은 위대한 일이 아니다. 프랑시스 잠의 시에서 우리는 위대한 게 무엇인지 발견할 수 있다.

“위대한 것은 인간의 일들이니/나무 항아리에 우유를 담는 일,/꼿꼿하고 살갗을 찌르는 밀 이삭들을 따는 일,/숲의 자작나무를 베는 일,/어두운 벽난로와, 옴 오른 늙은 고양이와,/잠든 티티새와, 즐겁게 노는 어린아이들 옆에서/낡은 구두를 수선하는 일,/한밤중 귀뚜라미들이 날카롭게 울 때/처지는 소리를 내며 베틀을 짜는 일,/빵을 만들고 포도주를 만드는 일,/정원에 양배추와 마늘의 씨앗을 뿌리는 일,/그리고 따뜻한 달걀들을 거두어들이는 일.”

내 책상 위 벽에 붙은 그림은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우유를 따르는 여인’이다. 나는 문학 행사로 방문했던 암스테르담 레이크스 미술관에서 이 그림을 샀다. 빛과 색채에 매료되어.

그림 속 여인은 햇살이 드는 창가에서 우유를 따르는 일에 몰입한다. 넉넉지 않은 살림이지만 매일 정해진 시간에 우유를 따르고 음식을 준비하는 게 몸에 밴 사람 같다. 고요 속에 우유 따르는 소리만 들리는 이 그림에서 우리는 가장 평범한 일상 속에 숭고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는 걸 새삼 깨닫게 된다.



레이크스 미술관의 이 여인이

세심하게 화폭에 옮겨진 고요와 집중 속에서

단지에서 그릇으로

하루 또 하루 우유를 따르는 한

세상은 종말을 맞을 자격이 없으리라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베르메르’



쉼보르스카는 노벨 문학상을 받은 폴란드 시인으로 레이크스 미술관에서 ‘우유를 따르는 여인’을 보고 이 시를 썼다. 정성스럽게 반복되는 일상의 노동이 있는 한, 인류에게는 여전히 희망이 있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시다. 세상을 구원하는 건 이토록 소소하고도 위대한 일상을 지켜가는 평범한 존재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작품이다. 우리의 삶을 깨뜨릴 자격은 누구에게도 없다는 것. 폭격으로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속히 미국과 이란의 전쟁은 끝나야 한다.

 

김이듬 시인·서울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