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유럽 최후 독재자’의 평양 나들이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입력 :
수정 :
폰트 크게 폰트 작게

동유럽 벨라루스는 한때 국내에서 ‘백(白)러시아’로 불렸다. 이는 벨라루스가 직역하면 ‘하얀 러시아’라는 점에 착안한 명칭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벨라루스는 오랫동안 러시아의 일부였다. 오늘날에도 민족적·언어적 유대감 때문인지 러시아와 무척 가깝게 지낸다. 우리는 옛 소련(현 러시아)에 속해 있던 벨라루스가 1991년 냉전 종식 및 소련 해체를 계기로 가까스로 독립국이 됐다고 흔히 알고 있다. 그런데 벨라루스는 1945년 유엔 창설 회원국들 중 하나다. 실은 유엔 출범 당시 소련이 정식 주권 국가로 볼 수 없는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우격다짐 끝에 회원국으로 밀어넣은 결과다. 물론 소련 연방의 구성원에 불과한 두 나라가 유엔에서 무슨 비중있는 역할을 했을 것 같진 않다.

 

지난 26일 알렉산더 루카센코 벨라루스 대통령(왼쪽)의 평양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열린 연회에서 루카센코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건배하고 있다. 노동신문·뉴스1.
지난 26일 알렉산더 루카센코 벨라루스 대통령(왼쪽)의 평양 방문을 환영하기 위해 열린 연회에서 루카센코와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건배하고 있다. 노동신문·뉴스1.

1991년 벨라루스가 독립할 당시 알렉산더 루카센코(71)는 소련 공산당원이자 소련군 장교였다. 애초 소련 해체에 반대했던 그는 정작 신생 벨라루스 공화국이 들어서자 정부에 적극 참여했다. 37세 젊은 나이로 의회 부패방지위원회 의장이 되어 범죄자들의 엄격한 단죄로 인기를 얻었다. 독립 후 3년이 지난 1994년 6월 치러진 첫 대선에서 마흔의 루카센코는 80% 이상의 압도적 득표율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후 그는 야당을 탄압하고 개헌을 통해 대통령 연임 제한 규정도 없애며 정권을 이어갔다. 벌써 32년 가까이 집권한 그는 벨라루스의 초대 대통령인 동시에 현직 대통령이다. 이러니 국제사회에서 ‘유럽 최후의 독재자’라는 비판이 제기된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루카센코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러시아는 벨라루스와 공동으로 대규모 군사 훈련을 실시함은 물론 벨라루스 영토에 러시아 핵무기까지 배치했다. 이 때문에 벨라루스는 서방 국가들의 제재 대상에 오르고 올림픽, 월드컵 등 국제 체육 대회에 자국 선수단을 출전시킬 자격마저 박탈당했다. 그래도 루카센코는 막무가내다. 그보다 2살 많은 푸틴 ‘형님’만 잘 받들어 모시면 아무도 벨라루스를 못 건드릴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는 듯하다. 하긴, 야당이 사실상 궤멸한 상태에서 뚜렷한 경쟁자도 없으니 누가 루카센코를 말리고 나서겠는가.

 

지난 25일 북한을 방문한 ‘유럽 최후의 독재자’ 알렉산더 루카센코 벨라루스 대통령(오른쪽)이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환영식에 참석해 주민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다. 노동신문·뉴스1
지난 25일 북한을 방문한 ‘유럽 최후의 독재자’ 알렉산더 루카센코 벨라루스 대통령(오른쪽)이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열린 환영식에 참석해 주민들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고 있다. 노동신문·뉴스1

그 루카센코가 지난 25일부터 이틀간 북한을 방문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취임 후 처음 북한을 찾은 루카센코를 위해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성대한 환영 의식을 개최했다. 두 정상은 26일 회담을 갖고 양국 간 우호·협력 조약을 체결했으며, 외교·농업·교육·보건 등 분야의 공조 강화도 다짐했다. 루카센코가 돌격 소총을 선물로 건네면서 “적이 쳐들어오면 이용하라”고 말하자 김정은이 활짝 웃는 장면은 큰 화제가 됐다. 아마도 김정은은 루카센코로부터 러시아와 푸틴의 환심을 사는 법, 32년간 장기 집권의 비결 등에 관해 많은 교훈을 배웠을 것이다. 우리에겐 썩 달가운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