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부터 생성형 인공지능(AI)을 선도하는 미국 AI 기업 간 경쟁 구도가 바뀌고 있다. 동영상 생성, 쇼핑 등 다방면에서 AI를 접목하던 오픈AI는 경쟁사들의 맹추격에 ‘선택과 집중’ 전략을 채택했고, 수익성을 증명해야 하는 AI 기업들은 기업용 AI 시장 공략에 주력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AI 기술에서 뒤처졌다는 평가를 받던 애플이 의외의 성적을 올려 월가의 관심을 끌었다.
29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분석업체 앱매직 통계를 인용해 애플이 지난해 생성형 AI 애플리케이션(앱)으로부터 수수료 9억달러(약 1조3000억원)를 받았다고 보도했다. 해당 매출의 75%가 챗GPT에서 나왔고, xAI 그록 매출도 5%를 차지했다. 보통 앱스토어에 입점한 앱들은 첫해 구독료의 30%, 그 이후에는 매년 15%를 수수료로 낸다. 생성형 AI 경쟁 속에서 애플은 ‘통행세’로만 1조원 넘는 거액을 거머쥔 셈이다. WSJ는 올해 애플의 AI 관련 매출이 10억달러(1조5000억원)를 넘을 것으로 내다봤다.
◆AI 시대 디바이스 재주목
4000억달러(600조원)에 달하는 애플의 연 매출과 비교하면 AI 관련 매출이 작지만 의미는 남다르다. 생성형 AI가 빠르게 발전하고, 경쟁이 치열해지더라도 소비자가 이를 이용하는 매개체는 여전히 아이폰과 같은 기기(디바이스)라는 것이다. 애플 운영체제 iOS 앱스토어와 구글 안드로이드 플레이스토어의 시장 지배력은 AI 시대에도 유효하단 평가다. 오픈AI는 GPT스토어를 만들어 자체 앱 생태계를 구축하려 했지만 앱스토어 지배력에 흠집을 내진 못했다. 찰스 라인하트 존슨에셋매니지먼트 최고투자책임자(CIO)는 “애플이 AI 제공 업체들을 위한 ‘유료 도로(Toll road)’ 역할을 할 수 있다면 막대한 자본 지출 부담 없이도 장기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실적은 AI 기술 경쟁에서 뒤처진 애플이 경쟁력을 회복하는 데 발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애플은 2024년 애플 인텔리전스를 공개하고 사진 검색, 요약 등 운영체제 전반에 AI 기능을 도입했지만 시장 기대에는 못 미쳤다. 오히려 이용자들에게 “용량만 차지한다”는 지적을 받아왔다. 음성 비서 ‘시리’의 AI 업그레이드도 미뤄졌다.
마이크로소프트(MS), 메타 등 빅테크(거대기술기업)가 매 분기 수백억달러를 쏟는 투자 경쟁 속에서 애플이 취한 전략은 ‘온디바이스 AI’다. 클라우드 서버를 거치지 않고 기기 내에서 연산을 수행하는 방식이다. 개인 데이터가 외부 서버로 전송되지 않아서 개인정보 유출 위험이 낮고, 네트워크 지연 없는 빠른 속도가 장점이다. 하지만 기기 하드웨어 한계 탓에 거대언어모델(LLM)을 구동하기 어렵고, 전력 소모와 배터리 발열 등이 문제로 꼽힌다. 아직까진 온디바이스 기술로 쓸 만한 AI 기능을 구현하지 못하면서 애플은 지난 1월 구글 제미나이를 시리 고도화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시리에 외부 AI 모델을 붙여 AI 서비스를 강화하는 하이브리드 전략으로 풀이된다.
◆‘범용·생태계·코딩’ 구도로
애플과 2024년 파트너십을 맺고 챗GPT를 시리와 독점적으로 연동하던 오픈AI는 시장 지배력에 타격을 입었다. 경쟁사에 대규모 계약을 잇따라 넘겨준 데다 범용 AI 모델에선 제미나이 이용자가 급증하고 있고, 기업용 AI인 엔터프라이즈 AI 점유율은 앤트로픽 클로드와 격차가 벌어졌다.
생성형 AI 경쟁 구도는 범용, 생태계, 코딩 구도로 나뉘고 있다. 이용자는 여전히 챗GPT가 압도적이다. 지난달 기준 주간 활성 이용자는 8억명 이상으로 소비자 접점이 가장 크다. 다만 앱 확산세와 기업용 시장을 따져보면 얘기가 다르다. 앱 분석업체 앱피겨스에 따르면 제미나이는 지난달 2700만 다운로드를 기록해 앱 전체 순위 5위 안에 들었고, 월간 활성 이용자도 한 분기 만에 1억명 이상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
앤트로픽은 코딩·기업용 AI 시장에서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 멘로벤처스가 발간한 지난해 12월 보고서를 보면 기업용 LLM 시장에서 앤트로픽이 40%를 차지해 오픈AI(27%)와 구글(21%)을 앞섰다. 코딩 시장에선 앤트로픽(54%)이 오픈AI(21%)와 격차를 벌렸다고 분석했다.
구글은 검색과 모바일, 클라우드, 소프트웨어 등 기존 생태계를 제미나이 중심으로 재편해 사용자 접점을 빠르게 늘리고 있다. 앤트로픽은 대중에 집중하기보단 전문성에 ‘올인’하고 클로드를 개발 조직의 필수 도구(툴)로 만들었다.
위기에 빠진 오픈AI는 비주력 사업을 정리해 AI 경쟁력 확보에 나섰다. 지난 24일(현지시각) 동영상 생성 AI 서비스 ‘소라’를 종료할 계획이라고 밝혔고, 지난해 출시한 쇼핑 기능 ‘인스턴트 체크아웃’ 서비스도 끝내기로 했다. 챗GPT에서 월마트 등 쇼핑몰 상품을 검색·구매할 수 있는 기능인데, 사용률이 부진했다.
쇼핑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으로 사업 다각화를 시도했던 오픈AI가 ‘돈 되는’ 사업을 위해 기술력에 다시 매진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올해 하반기 기업공개(IPO)를 앞두고 수익성을 높여 시장 주목도를 올리기 위한 구조 재편을 본격화했다는 분석이다. 피지 시모 오픈AI 애플리케이션 부문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직원회의에서 “지금은 기업용 AI 시장에서 주도권이 결정되는 중요한 시점인데 사이드 퀘스트(부업)에 한눈을 팔며 중대한 순간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오픈AI는 4500명 수준인 인력 규모를 올해 말까지 8000명으로 확대하고, 챗GPT와 코딩 플랫폼 ‘코덱스’, 웹브라우저 ‘아틀라스’를 통합한 데스크톱용 ‘슈퍼앱’도 만들기로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