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란 전쟁이 끝날 조짐을 보이기는커녕 예멘의 친이란 반군 후티 참전 등으로 장기화 먹구름이 드리우면서 국내 산업계의 곡소리도 커지는 모습이다. 호르무즈해협 봉쇄 등 중동전쟁 여파로 원유와 나프타(납사), 헬륨, 요소 등 산업 전반에 쓰이는 중동산 원재료 수입 통로가 막히며 공급망 균열이 심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고유가와 고환율에 물류비 폭등까지 겹쳐 제조업부터 소비재 산업까지 연쇄적으로 생산원가 상승이 현실화하는 양상이다. 덩달아 생활 물가도 뛰고 있는 만큼 전쟁 장기화에 대비한 특단의 대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29일 산업계에 따르면, 중동전쟁이 한 달 넘도록 진정 기미가 안 보이면서 주요 산업 원자재의 중동산 수입 의존도가 높은 우리 경제는 그야말로 백척간두에 서 있는 형국이다. 업종마다 미리 챙겨둔 원료 재고 소진 속도가 빨라지는데 공급망이 언제 정상화할지 전혀 가늠할 수 없어서다.
액화천연가스(LNG) 부산물로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산업용 가스 헬륨이 대표적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웨이퍼 냉각 등에 쓰이는 헬륨을 전량 수입하는데, 지난해 한국 수입물량의 65%가량이 카타르산이었다. 그러나 최근 이란이 카타르의 LNG 생산시설인 라스라판 산업단지를 공격하면서 헬륨 생산이 중단됐다. 반도체 제조 공정 과정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제거하는 데 쓰이는 브롬 수급에도 빨간불이 켜졌다고 한다. 브롬 수입은 대부분 이스라엘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반도체 업계의 경우 헬륨과 브롬 등 핵심 원료 비축분이 몇 개월치에 지나지 않고 순도 문제 등으로 대체 공급망을 찾기도 쉽지 않아 전쟁이 길어지면 큰 타격을 입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대부분 농작물에 사용되는 질소 비료의 핵심 원료인 요소도 전쟁 이후 수급에 문제가 생겼다. 중동에서 생산되는 요소가 국내 수입 물량의 40% 정도 차지하는 데다 대부분 호르무즈해협으로 들여오기 때문이다. 이 밖에 나프타 공급난 등으로 식품 포장재와 PET병, 의료용 고무장갑과 백, 합섬 섬유 등 소비재 산업들의 걱정도 태산이다.
국내 선박보험료가 최대 10배 넘게 폭등하는 등 물류난도 심화하고 있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지난 13일 기준 호르무즈해협 등 전쟁위험 지역 진입을 위해 보험 계약을 갱신한 선박은 총 26건이다. 이 중 한화손해보험이 간사사(대표 보험사)로 참여한 1건의 보험료가 5000만원에서 5억8000만원으로 1056% 올라 상승폭이 가장 컸다. 현대해상은 8건의 보험료 총액이 6억4000만원에서 41억5000만원으로 553% 올랐다. 이 밖에 삼성화재(334%), KB손해보험(253%), 메리츠화재(221%) 등도 일제히 상승했다.
항공사들은 운항편을 줄이고 유가할증료 등 각종 요금을 올리며 수익성 방어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정부는 적절한 수출·가격통제 방안을 찾으며 물가 불안 진화에 애쓰고 있다. 앞서 조치한 나프타 외에 다른 석유화학 제품 등에 대한 수출제한 카드를 꺼내들지 주목된다. 이와 관련, 김용범 청와대 정책실장은 전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수출 통제는 국내 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국제 문제를 만든다”며 “파트너 국가의 생산 차질은 핵심광물·에너지·식량 등 우리가 의존하는 영역의 교란으로 되돌아온다”고 경고했다. 그는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더 강한 통제가 아니라 정교한 운영”이라며 수출 금지 품목 확대론을 경계했다.
전문가들은 업계와 정부 노력으로는 전쟁 장기화에 대비하기엔 역부족이라고 제언했다. 가격 통제는 단기적으로 수요를 통제할 수 있지만 공공기관 등의 부채를 만들 수 있기에 중장기적으로 끌고갈 수 없다는 설명이다. 유승훈 서울과기대 미래에너지융합학과 교수는 “국민들에게 지금 위기상황이라는 것을 알리고 대대적인 에너지 절약 대책을 병행해야 한다”며 “총리실을 컨트롤타워로 하는 강력한 에너지 절약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어야 할 때”라고 제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