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호조 판서에 권이진 같은 사람을 얻어 오래 맡길 수 있다면 근심이 없을 것이다.’(승정원일기 1781년(정조 5) 9월 19일)
예나 지금이나 예산이 문제다. 정부 운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고민은 예산을 어떻게 확보하느냐에 있다. 재정 지출을 줄이기 어려우니, 예산을 늘려야 한다. 현대 사회는 재정 수입의 융통이 다양하지만, 조선시대는 달랐다. 예산은 전적으로 백성이 낸 세금에 의존했다.
조선시대 예산을 책임지는 자리는 호조 판서다. 임금은 용처가 생길 때마다 호조 판서를 불렀다. 호조 판서는 늘 나라 곳간의 잔고를 파악하고 있었다. 임금이 언제 무슨 일로 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다들 자기 일이 힘들다고 하겠지만, 6조 판서 가운데 가장 고민이 많은 직무이면서, 경제 감각과 청렴함을 갖춘 인재만이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호조 판서였다.
광해군 시절 황신(黃愼·1560~1617)은 호조 판서에게 필요한 능력을 잘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가장 피폐했을 무렵 호조 판서를 맡았다. 황신은 5년간 호조 판서로 일하면서 재정을 튼실하게 키웠다. <광해군일기> 속 그에 대한 평가는 청렴한 ‘일 처리’, 이에 따른 조정과 주변 관료의 ‘신뢰’로 요약할 수 있다. 경제 감각, 청렴, 신뢰 모두 호조 판서에게 필요한 덕목이었다.
권이진(權以鎭· 1668~1734년)과 박문수(朴文秀·1691∼1756년)는 영조 시대 호조 판서다. 권이진이 규정과 원칙을 중시했다면, 박문수는 반대였다. 암행어사로만 알려졌지만, 박문수는 유능한 실무형 관료였다. 호조 판서 박문수는 과감하게 일을 처리했다. 사관(史官)은 그를 두고 ‘강력하게 일을 했으며, 성심으로 헛된 비용을 절감해 백성에게 칭송받았다’라고 평가했다. 과감한 일 처리는 성과와 함께 불협화음도 일으켰다. 그를 두고 ‘정밀하게 사무를 아는 것은 권이진에게 미치지 못한다’라는 평이 뒤따랐던 이유다.
호조 판서와 앙숙인 관료도 있다. 바로 평안 감사다. 평안도는 세금을 호조에 보내지 않고 지역에 남겨 둘 수 있었다. 17세기 후반 늘 부족한 예산에 허덕이던 호조의 레이더 망에 ‘평안도 세금’이 잡혔다. 호조는 평안도 세금을 조정으로 거둬들이려 했고, 평안 감사는 법적 근거가 없다며 보내지 않고 버텼다. 호조는 현실 재정을, 평안 감사는 세법을 근거로 맞선 것이다.
영조는 호조의 손을 들어줬다. 호조는 영조의 지시를 받들어 평안도 재원을 거둬들이려 애썼으나, 평안 감사는 요지부동이었다. 새로 임명된 평안 감사도 다르지 않았다. 이에 영조는 호조와 공조에서 꼼꼼한 일 처리로 이름이 높았던 권이진을 평안 감사로 임명했다. 영조는 권이진에게 뜻한 바가 있어 임명했으니, ‘유념’하라고 말했다. 평안도 세금을 정부 재원으로 확보하라는 의미였다.
영조는 권이진이 신임 평안 감사로 떠나는 모습을 보며 안심했을 터였다. 나라의 곳간 사정을 가장 잘 아는 전 호조 판서가 평안 감사로 부임했으니, 평안도 세금 문제가 해결됐다고 여겼을 법하다. 권이진의 평안 감사 임명은 나름대로 신의 한 수였다. 다만, 신임 감사가 감영에 당도하기 전까지만 보면 그렇다.
신임 평안 감사 권이진은 원칙주의자였다. 감영에 도착한 권이진은 규정과 원칙에 따라 평안 감사의 업무를 성실히 수행했다. 그런데 영조가 기대했던 바와 ‘다르게’ 성실했다. 그는 평안도 재원을 조정에 보내지 않았다. 이유는 분명했다.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권이진이 호조 판서가 아니라 평안 감사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채제공(蔡濟恭·1720∼1799년)은 자신이 호조 판서에 임명되자, 늙은 아전들이 새 판서가 옛 권이진 판서가 남긴 규범을 이어받을까 두렵다며 수군거렸던 일을 술회했다. 40년 전 호조 판서를 지냈던 권이진이 얼마나 엄격하게 재정을 관리했는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영조의 유념하라는 말도 법률과 원칙에 따라 실행하지 않았으니, 융통성 운운하는 아전에게 권이진은 저승사자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엄정하기로 이름 높던 정조 역시 권이진 같은 사람을 오래 쓸 수 있다면 근심이 없을 것이라 말할 정도였다.
상황과 원칙 가운데 무엇을 우선할까? 딱 잘라 말하기 어렵다. 권이진에게도 어려운 문제였음은 자명하다. 권이진은 후자를 택했다. 규정에 기반하지 않은 세입과 세출은 향후 더 큰 문제를 일으킨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이 일을 전례로 삼아 법전에도 없는 마구잡이식 재정 확충이 뒤를 이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또 권이진은 호조 판서를 지냈다. 그는 나라 곳간 열쇠를 쥐었던 관료로서, 국고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가 계산하기에 지방 재원을 규정 외로 보낼 만큼 조정의 곳간은 비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빈틈없던 임금 정조가 호조 판서로 권이진 같은 인재를 바랐던 이유겠다.
박범 공주대 사학과 부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