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엔 서울에 사는 고교(남녀공학) 동기들을 가끔씩 만난다. 계절마다 모이는 정규모임 말고도 삼삼오오 만나는 번개모임에도 참석한다.
학교 다닐 땐 이름도 모르고, 말 한 번 섞어보지 못한 사이인데도, 그 긴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금방 친근해지고, 단숨에 무장해제시켜 버리는 게 너무 신기해, 처음엔 조금 조심스러웠으나 몇 번 만나다 보니 이 모임이 정말 좋아졌다. 학연과 동향이 지닌 친밀한 유대감과 동질감이 이런 거구나, 감탄하면서.
그러나 그보단 같은 시절, 같은 장소를 공유하다 각자의 굴곡진 삶의 여정을 거쳐,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란 시구처럼 “…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인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들이 되어 만나니 정말 편하고, 정답고, 거리낌이 없어 좋았다. 살 만큼 살아냈다는 관록이 주는 관대함이랄까. 스트레스를 전혀 남기지 않았다.
모두가 힘껏, 소신껏, 열정을 다해 살아왔으니 이제는 그 책임과 의무에서 벗어나 자신을 모두 내려놓고 건강하고 지혜로운 노인으로 재밌게 늙어가고 싶다는 암묵적 결의와 희망을 나눈 것도 아닌데, 순환되는 연대감은 따뜻하고, 허심탄회하고, 무위했다. 이 나이에 필요한 이런 모임, 그냥 생긴 대로 있는 그대로 물처럼 물소리처럼 흘러가는 모임이 하나 있었으면 했는데… 참 고맙고 다행스러웠다.
제각각 살아온 여정도 다르고 취미, 취향도 다르지만, 앞으로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고, 그동안 너나 할 것 없이 목까지 꽉꽉 채우고 산 긴장의 단추를 하나하나 풀어내며 마음속 깊은 기억들과 추억들을 자유로이 꺼내 보여주고 나누는 해방감 또한 각자에게 또 다른 노년의 미학이 되리라.
같은 시절, 같은 장소, 같은 문화를 공유했다는 게 이토록 편안하고 너그러울 줄이야. 늘 만나왔던 시인이나 작가들과 달리 한 시절을, 그것도 청소년기를 함께 보낸 공동 화제는 무궁무진해 어떤 말을 해도 어떤 것을 끄집어내도 하하호호로 변해 물처럼 흘러 흘러가게 만들어 주고, 여유롭게 그 물결을 탈 수 있게 해주니까. 갑자기 황혼 녘에 친구들이 많이 생기고 함께 길어 올릴 회상의 샘을 발견해 정말 좋다. 그것도 골수 아날로그 세대의 진득한 향수를 공유하고 누린 세대들로!!
이제 곧 벚꽃이 피리라. 그러면 봄은 더한층 환해지고 더 풍성해질 것이다. 모든 나무에 잎이 돋고 굳게 닫힌 창들이 활짝 열릴 것이다. 그 상큼한 봄날의 한가운데로 자전거 마니아인 한 동기는 지금쯤 신나게 페달을 밟으며 달려가고 있을 것이다. 자전거 타는 사람만 보면 자연스레 그를 떠올리게 해준 것도 나에겐 큰 즐거움이다. 얼굴 가득 봄날처럼 다정한 미소를 한껏 짓게 해주므로.
김상미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