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설왕설래] 통행세

입력 :
폰트 크게 폰트 작게

고대 로마제국은 세계 최초로 체계적인 도로망을 구축한 국가였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군사와 행정, 상업을 위해 길은 필수였다. 대신 공짜는 아니었다. 일부 다리와 주요 통로에서는 통행세를 징수했다. 상인들에게는 더 높은 비용이 부과됐다. 군사적인 경우는 예외였다. 통행세는 단순한 세금이 아니라 지배와 권력의 표시였다. 때로는 과도한 통행세가 혁명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중세시대 라인강은 유럽 상업의 핵심 수로였다. 그런데 강을 따라 수십 개의 성이 세워지고, 각 성주가 통행세를 걷었다. 배 한 척이 지나가며 여러 번 세금을 내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불법적으로 과도한 세금을 요구하거나 돈을 내지 않으면 공격하는 경우도 있었다. ‘강도 귀족’으로 불리었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는 ‘턴파이크(turnpike)’로 불린 마차용 유료도로가 지방 지주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건설됐다. 도로 입구에 막대(게이트)를 세워 돈을 내야만 통과할 수 있도록 했다. 돈이 없는 농민과 서민은 반발했다. 길을 이용할 권리에 대한 논쟁으로 번졌다.

바닷길도 열려 있었으나 그냥 지나다닐 순 없었다. 믈라카해협. 인도양과 태평양을 잇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해상통로 중 하나로 석유, LNG, 컨테이너선이 끊임없이 오가는 길이다. 폭은 좁고, 수심은 얕고, 작은 섬들이 밀집했다. 한때 해적의 무대였다. 왕래하는 선주들 사이에선 “보험료보다 싸면, 해적에게 돈을 주는 게 낫다”는 말이 돌았다. 해적 범죄가 통행세 구조로 변모한 것이다.

이란 의회가 30일(현지시간) 호르무즈해협 통과 선박에 대한 통행세 징수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달 초부터 혁명수비대가 운영해 온 통행료 부과를 공식화·체계화하겠다는 얘기다. 이란은 이미 호르무즈해협에 갇힌 선박들에 최대 200만달러(약 30억원)를 요구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통행료 징수가 현실화하면 연간 1000억달러(약 150조원)의 세수입이 발생할 것으로 추산된다. 전비에 충당할 것으로 보인다. ‘공해와 맞닿은 영해의 경우 공공질서를 해치지 않는 한 자유로운 통항을 보장한다’는 유엔해양법협약(UNCLOS)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다. 이쯤 되면 ‘강도 국가’나 다름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