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버지니아주 센터빌에 거주하는 케이시(60)는 지난해 조 바이든 행정부 시절 생긴 세액공제 혜택이 사라지기 전 태양광 패널 설치와 전기차 구매를 서두른 것이 매우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란 전쟁 여파로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 이상으로 올랐지만 전기차 구매로 유가 상승 충격을 피하고, 태양광 패널로 자체 발전을 하면서 데이터센터가 다수 들어선 뒤 버지니아주의 전기세 상승에도 영향을 작게 받고 있기 때문이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의 중고 전기차 딜러 회사인 ‘에버’(Ever)에선 최근 전기차 구매에 대한 상담 예약이 갑자기 급증했다. 공동 창업자이자 최고운영책임자(COO)인 맥시밀리안 쿼터머스는 “거의 모든 고객 상담에서 유가가 언급된다”며 “최근 몇 주의 (전기차) 수요 상승은 우리가 본 것 중 가장 강력한 수준”이라고 말했다.
이란 전쟁 여파로 유가가 크게 상승하면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홀대’로 침체하던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와 전기차에 대한 관심이 최근 미국에서 다시 높아지고 있다. 기후변화 때문이 아니라 가격 안정성과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다. 연방정부 정책에도 불구하고 태양광 등 재생에너지 발전에 대한 관심이 실제 현장에선 여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안보’가 된 재생에너지
지난달 9일(현지시간)부터 13일까지 텍사스주 휴스턴에서 열린 세계 최대의 에너지 분야 회의인 CERAweek 콘퍼런스에서는 재생에너지가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다뤄졌다. 과거 재생에너지가 비효율성 등으로 인해 불안정하다고 여겨졌던 것과 달라진 기류다. S&P 글로벌이 매년 개최하는 CERAweek 콘퍼런스는 에너지 분야 최고 회의로, 에너지업계·정부 등이 참여하며 재생에너지보다는 석유·천연가스 생산이 주요 의제로 다뤄진다. 올해는 특히 트럼프 행정부의 풍력·태양광에 대한 적대적 태도가 영향을 미쳐 재생에너지와 관련된 세션이 더 줄었다. 정부의 지원이 줄고 기업들도 보조를 맞추다 보니 생긴 결과다.
그럼에도 막상 회의가 시작되자 재생에너지가 적지 않게 언급됐다. 회의 시작 한 주 전 갑자기 터진 대이란 전쟁으로 국제 유가가 상승하면서다.
로이터통신은 “이란 전쟁으로 석유와 가스 공급이 다시 불확실해지면서, 콘퍼런스에서 업계 관계자들은 과거에는 재생에너지 투자를 제한하게 만들었던 에너지 안보 우려가 오히려 기후변화보다 더 강력한 (재생에너지) 추진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밝혔다”고 전했다. 콘퍼런스에 참석한 제프리 파이엇 전 미 국무부 에너지 담당 차관보는 “결국 가격이 중요하다. 풍력, 태양광, 배터리를 결합한 시스템은 점점 더 경제적으로 매력적인 선택이 되고 있다”며 “각국은 이를 기후 목표가 아니라 경제적 에너지 접근성, 아이러니하게도 점점 더 ‘에너지 안보’ 수단으로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NYT) 역시 “이란 전쟁은 에너지업계 주요 연례행사인 CERAweek에서도 큰 이슈였다”고 전했다. NYT는 트럼프 행정부를 의식하는 기업들이 공개적으로 이란 전쟁이 에너지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언급하길 꺼린다면서도 많은 기업이 재생에너지 수요가 증가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급증하는 인공지능(AI) 데이터센터 건설로 전력 수요가 증가해 천연가스로 이를 충족하기 어렵고, 빅테크(거대기술기업)들도 여전히 기후 목표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지난해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재생에너지 확대의 주된 동인은 기후변화가 아니라 에너지 안보가 될 것이라는 취지로 언급한 바 있다. 에너지 전환은 단순히 탄소배출 감축을 위한 것이기보다는 에너지 시스템을 더 안전하고 회복력 있게 만들고, 가격을 낮추며, 타국 의존도를 줄이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란 전쟁은 비롤 총장이 언급한 지정학 요인, 즉 ‘타국으로 인한’ 에너지 위기의 대표적인 사례가 된 셈이다.
◆혜택 없앤 전기차에도 관심 급증
미국 원유시장은 국제 유가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미국 내에서 생산되는 국내산 원유가 대부분 유통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다른 나라들에 호르무즈해협 호위 참여를 요구하며 펴는 논리다. 하지만 미국 일반 소비자들이 접하는 유가가 낮게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1일 현재 텍사스유 가격은 배럴당 103.8달러로, 국제 유가와 크게 차이가 없다.
블룸버그는 이란 전쟁 첫 주에 인터넷에서 전기차 검색이 20% 늘었다고 보도했다.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유가가 급등하자 전기차 수요가 증가한 것과 비슷한 상황으로, 미국 소비자들이 유가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73년 석유 금수조치 당시에도 미국 소비자들은 작고 연비 좋은 일본 자동차를 선택하는 것으로 시장에 적응했고, 미국 내에서 리튬이온 배터리 개발 투자가 이어졌다.
미국 전기차 시장은 지난해 바이든 행정부의 세액공제 혜택이 완전히 사라진 뒤 최근 침체를 겪고 있었다. 정부 지원이 줄자 디트로이트의 포드·GM 등 자동차업체들은 전기차 생산라인을 축소하고 연비가 낮은 스포츠유틸리티차(SUV) 생산을 강화하기도 했다. 여기에 이란 전쟁이라는 새로운 변수가 등장한 것이다.
일단 미국 자동차 업계는 당장 전기차 생산을 늘릴 계획은 없다는 입장이다. 트럼프 행정부가 전기차 생산에 대한 인센티브를 없앤 데다, 전쟁을 빨리 끝내겠다고 호언장담하고 있어 조만간 유가 안정을 기대하는 것으로 보인다. GM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블룸버그에 “소비자의 행동 변화에는 최소 4∼6개월의 고유가 지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투자자들은 시장의 분위기를 감지하는 모습이다. 블룸버그는 일부 태양광·배터리 기업 주가가 전쟁 이후 크게 상승했다고 전했다.
◆신규 태양광 설비 73%, 공화당 주에
트럼프 대통령은 태양광·풍력 발전을 “그린 뉴 스캠(green new scam)”이라고 폄훼해왔지만, 미국 에너지부는 1월 발간한 단기에너지전망에서 “현재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전력원은 태양광”이라고 밝혔다. 에너지부 전망에 따르면 태양광 발전량은 2025년 290GWh에서 2027년 424GWh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됐다. 2025년 말과 2027년 사이 미국 태양광 설비 용량도 약 49% 증가할 것으로 관측됐다. 재생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계속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공화당 유권자들 사이에서도 재생에너지 지지는 낮지 않다. 지난해 퓨리서치센터에서 공화당 성향의 응답자의 60%, 민주당 성향 응답자의 90%가 태양광 발전을 지지했다. 미국 에너지 전문 온라인 매체 오일프라이스US(Oil Price US)에 따르면 현재 태양광 보급 확대는 공화당 주지사가 이끄는 주들이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 신규 태양광 설비의 약 73%는 텍사스, 플로리다, 인디애나, 오하이오, 아칸소에서 설치됐는데, 이들 주는 모두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한 ‘레드 스테이트’다. 겉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의 화석연료 중심 에너지 정책에 반대하지 않으면서 ‘조용히’ 태양광 발전을 추진해왔다.
이 주들은 일조량이 많아 태양광 발전에 적합한 기후 조건을 갖추고 있다. 재생에너지 발전의 실질적인 필요와 현실적 조건이 정치를 앞선 것이다. 미국 에너지정보청(EIA) 자료를 보면 2025년 텍사스의 태양광 발전량은 5만8600GWh로, 그 전해까지 태양광 발전량 전국 1위였던 캘리포니아를 앞질러 1위를 기록했다. 2025년 캘리포니아의 태양광 발전량은 5만3700GWh였다.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해 재생에너지 축소를 위해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혜택을 줄일 때도 이 법안으로 혜택을 보는 공화당 주의 의원들이 반대한 바 있다. 트럼프 행정부 들어 연방정부의 재생에너지 정책 추진 속도가 줄었지만, 주정부 차원에서는 관심이 계속될 것을 보여주는 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