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미국 대법원장, 트럼프 면전에서 “행정부 논리 희한” 직격

‘출생 시민권’ 사건 재판 공개 변론 열려
트럼프, 현직 대통령 최초로 법정 참관
방청석 앉아 대법관들에게 ‘레이저 눈빛’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연방대법원의 공개 변론에 방청객으로 출석하는 이례적 광경이 연출됐다. 본인이 내린 행정명령의 효력을 다투는 재판인 만큼 대법관들에게 심리적 압박을 가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하지만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은 트럼프의 ‘레이저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신에 따른 발언을 이어갔다.

 

트럼프는 1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 대법원 청사를 찾았다. 이날은 대통령 자격이 아니고 공개 변론을 직접 참관하는 시민으로 행세했는데, 특별한 발언은 하지 않은 채 방청석 맨 앞줄에 앉아 재판을 지켜보기만 했다. 미 언론은 “현직 대통령이 대법원 공개 변론이 진행되는 법정에 자리한 첫 사례”라고 보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 사진은 지난 2020년 2월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이뤄진 트럼프의 국정연설을 계기로 만난 두 사람이 악수하는 모습. 게티이미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왼쪽)과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 사진은 지난 2020년 2월 연방의회 의사당에서 이뤄진 트럼프의 국정연설을 계기로 만난 두 사람이 악수하는 모습. 게티이미지

지난 2025년 1월 갓 취임한 트럼프는 이른바 ‘출생 시민권’을 금지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출생 시민권은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는 자동으로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는 제도다. “미국에서 태어나거나 미국에 귀화했고, 미국의 관할에 있는 모든 사람은 미국과 그들이 거주하는 주(州)의 시민”이라는 수정헌법 14조(1868년 채택)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런데 트럼프는 해당 헌법 조항이 남북전쟁(1861∼1865) 이후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을 뿐 현대에까지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는 입장이다. 자신의 의사에 반해 아프리카 등에서 미국으로 끌려온 흑인 노예들 자녀에게 시민권을 부여하기 위해 도입된 장치라는 것이다. 최근 트럼프는 “출생 시민권은 노예들 자녀를 위한 것”이라며 “터무니없이 자녀가 미국 시민이 되기를 바라는 중국이나 다른 나라의 부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트럼프의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이민자 가족 등이 법원에 위헌 소송을 제기함에 따라 사안은 결국 대법원까지 오게 됐다.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출생 시민권’ 사건 재판의 공개 변론이 열린 1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 제한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이 대법원 청사 앞에서 모여 시위를 하고 있다. EPA연합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출생 시민권’ 사건 재판의 공개 변론이 열린 1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이민 제한 정책에 반대하는 이들이 대법원 청사 앞에서 모여 시위를 하고 있다. EPA연합

이날 구두 변론에서 행정부 대리인으로 나선 존 사우어 법무부 송무 담당 차관은 “불법 이민자나 임시 체류자인 부모는 미국에 ‘정착’한 상태라고 볼 수 없다”는 주장을 폈다. 자연히 그들의 자녀에게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는 행정명령이 곧 헌법 위반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는 취지다. 사우어 차관은 “중국 등 미국에 적대적인 국가 국민들이 자녀에게 미국 국적을 선사하기 위한 이른바 ‘원정 출산’은 미국의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도 했다. 출생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는 유럽 등 여러 나라들의 사례 또한 들었다.

 

하지만 존 로버츠 대법원장은 사우어 차관의 논리에 대해 “매우 희한하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그는 “행정부의 정책 목표는 사법부가 하는 법적 분석에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말로 사우어 차관의 주장이 미국의 법률과 판례에는 맞지 않는다는 점을 에둘러 지적하기도 했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2005년 공화당 소속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에 의해 발탁됐으며, 보수 성향의 법조인이다.

 

현재 대법원에는 앞서 트럼프가 직접 임명한 닐 고서치, 브렛 캐버노, 에이미 코니 배럿 3명의 대법관이 있다. 그런데 이들도 정부에 등을 돌리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고서치 대법관은 ‘부모가 미국에 정착한 상태이어야 한다’는 취지로 변론한 사우어 차관을 겨냥해 “수정헌법 14조 제정 당시 논의에서 ‘정착’이란 개념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캐버노 대법관은 “법원의 역할은 정책을 다루는 것이 아니고 판례에 따라 법률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못박았다. 배럿 대법관은 “만약 미국에서 출생한 아이의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라고 되물어 정부 논리의 허점을 지적했다.

1일(현지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 연방대법원에서 열린 ‘출생 시민권’ 사건 재판의 공개 변론 방청을 마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태운 차량이 백악관 복귀를 위해 대법원 청사를 빠져나가고 있다. 트럼프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약 2시간 동안 법정 방청석 맨 앞줄에 앉아 조용히 심리를 지켜봤다. AP연합
1일(현지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 연방대법원에서 열린 ‘출생 시민권’ 사건 재판의 공개 변론 방청을 마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태운 차량이 백악관 복귀를 위해 대법원 청사를 빠져나가고 있다. 트럼프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약 2시간 동안 법정 방청석 맨 앞줄에 앉아 조용히 심리를 지켜봤다. AP연합

대법원장을 포함해 9명의 대법관으로 구성된 미국 대법원은 현재 보수 6 대 진보 3의 보수 우위 구도다. 하지만 지난 2월 대법원은 모두의 예상을 깨고 대법관 6 대 3 의견으로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정책을 무효화했다. 트럼프가 직접 뽑은 보수 대법관 2명도 다수의견에 가담했다. 이에 트럼프는 대법원과 대법관들을 맹비난하며 폭언을 퍼부었다.

 

이날 대법원 안에서 입을 굳게 다문 트럼프는 법정 밖에선 대법관들을 강하게 압박하는 듯한 언행을 일삼았다. 그는 “우리는 멍청하게도 출생 시민권을 허용하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라며 “멍청한 판사와 대법관으로는 위대한 나라를 만들 수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