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 리지 웨이드/ 김승욱 옮김/ 김영사/ 3만2000원
우리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21세기를 번영의 상징이자 장밋빛 미래로 여겼다. 대규모 전쟁은 사라지고, 전 세계는 하나의 교역망으로 연결되었으며, 기술의 발달은 인류를 기아와 재난으로부터 완전히 해방시켜 줄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모든 것이 바뀌었다. 세계적인 팬데믹이 닥쳤고, 기후변화로 인한 재난은 점점 빈번해지고 있다. 미국과 이란의 군사적 충돌에서 보듯, 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여겼던 전쟁의 불길도 다시 거세지고 있다.
사실 우리는 ‘아포칼립스’를 두려워하면서도 언젠가는 올 것이라 막연히 예상해 왔다. 그러나 그 단어를 현실로 체감한 적은 없었다. 적어도 우리 세대는 아닐 것이라고 믿어왔다. 하지만 2020년대 이후, 많은 이가 점차 파국의 두려움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과학 저널리스트 리지 웨이드는 이 책에서 지금의 위기가 인류 최초의 ‘아포칼립스’가 아님을 강조한다. 인류는 이미 수차례 ‘세계의 종말’을 경험해왔으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질서로 재편돼 왔다고 설명한다. 그는 단순한 묵시록적 경고 대신, 종말이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는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다양한 역사적 사례를 통해 보여준다.
첫 장에서는 네안데르탈인의 ‘종말’을 다룬다. 약 4만년 전, 유럽과 서아시아에 널리 퍼져 살던 네안데르탈인은 갑작스럽게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들은 혹독한 빙하기 환경에서도 살아남을 만큼 강인한 생존력을 지녔고, 도구 제작과 사냥 능력에서도 뛰어났다. 매장 의식과 같은 문화적 행동까지 보였던 존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결국 호모 사피엔스와의 경쟁 속에서 밀려나거나 흡수됐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들의 ‘종말’이 완전한 소멸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현대 인류의 DNA에는 여전히 1∼2%의 네안데르탈인 유전자가 남아 있다. 이는 두 종이 단순한 경쟁 관계를 넘어 실제로 교배하며 유전적으로 섞였음을 의미한다. 저자는 이를 두고 “네안데르탈인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인류라는 더 큰 집단 안으로 재편입된 것”이라고 해석한다. 그 결과 인류는 사실상 단일 종인 호모 사피엔스로 재구성됐다.
또 다른 사례는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이다.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간 이 대재앙은 사회를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그러나 저자는 이 비극이 오히려 중세 봉건 질서를 약화시키고 노동자의 지위를 끌어올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분석한다.
흑사병 이후 살아남은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며 사회를 재건해 나갔다. 지배층은 이전의 억압적인 체제로 돌아가려 했지만, 노동계층은 이를 거부했다. 고고학 연구에 따르면, 흑사병 이후 노동계층의 건강 상태와 생활 수준은 오히려 개선된 것으로 나타난다. 인구 감소로 노동력이 부족해지면서 농노들은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할 수 있었고, 이는 결국 르네상스와 근대로 이어지는 구조적 변화를 촉진했다. 아포칼립스가 사회의 체질을 바꾸는 ‘거대한 전환점’으로 작용한 셈이다.
가뭄이 불러온 문명의 붕괴 사례로는 마야 문명이 제시된다. 오늘날 멕시코 남부와 과테말라, 벨리즈 일대에서 번성했던 이 문명은 정교한 달력과 문자, 피라미드 건축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9세기 무렵, 이 화려한 도시들은 잇따라 버려지며 ‘대붕괴’를 맞는다.
그 핵심 원인으로는 장기간의 극심한 가뭄이 지목된다. 강이 적고 빗물에 의존하던 환경에서 수십 년간 강수량이 감소하면서 농업 기반이 붕괴됐고, 이는 식량난과 사회 불안, 전쟁, 정치 체제 붕괴로 이어졌다. 그러나 저자는 마야 문명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 더 작고 유연한 공동체 중심으로 재편됐음을 강조한다. 즉, 문명은 무너졌지만,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16세기 초 아즈텍 제국 역시 또 다른 ‘아포칼립스’를 경험했다. 수도 테노치티틀란은 수십만 명이 거주하던 거대 도시로, 정교한 수로와 농업 시스템을 갖춘 고도로 조직된 사회였다. 그러나 1519년, 에르난 코르테스가 이끄는 스페인 군대가 도착하면서 상황은 급변한다. 소수의 외부 세력이 불과 몇 년 만에 제국을 붕괴시켰다.
저자는 이 과정이 단순한 정복을 넘어 하나의 ‘문명적 종말’이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동시에 테노치티틀란은 오늘날 멕시코시티로 재탄생했다. 이는 유럽 식민주의 역시 하나의 거대한 아포칼립스였지만, 그 속에서도 새로운 사회가 형성됐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 책은 인류가 끊임없이 아포칼립스를 겪으면서도 살아남아 온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저자는 “아포칼립스는 시스템의 끝일지언정 인간의 끝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한 위기 역시 마찬가지다. 과거의 아포칼립스를 이해할수록 우리는 불확실한 미래를 더 잘 준비할 수 있다.
결국 이 책은 단순한 과거 회고에 머물지 않는다. 반복되어 온 종말의 역사 속에서, 현재의 위기를 넘어설 수 있는 통찰을 제시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