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의 말에는 바다를 건너야만 느낄 수 있는 이국스러움이 있다. 제주의 말이 이런 특성을 갖게 된 이유로 섬이라는 지리적 여건과 몽골의 직접적인 지배를 꼽을 수 있다. 구체적으로 지리적 고립은 제주의 언어에 중세 국어의 원형이 남아있게 했고 몽골의 지배는 그들의 언어와 제주의 말이 섞이게 했다. 하지만 풍토에 관심이 있는 내게는 제주의 거친 바람으로 인해 문장이 짧아지고 억양이 강해졌으며, 표준어에는 없는 독특한 성조가 남았다는 설명이 오히려 끌린다. 제주의 방언에서도 ‘오름(기생 화산)’, ‘코지(곶)’처럼 지형이나 ‘설릅(한쪽으로 기우뚱하게 기울어진 모양)’, ‘솔솔(성글고 듬성듬성한 모양)’처럼 형태를 묘사하는 단어에 관심이 더 간다. 그중에는 ‘뜨르’와 ‘옴팡’이라는 단어도 있다.
‘뜨르’는 ‘넓은 평지’나 ‘들판’을 의미한다. 화산활동으로 생겨난 제주에서 평평한 땅은 드물다. 그래서 한라산과 바닷가 마을 사이에 있는 뜨르는 방목지 등으로 쓰이는 공동체의 터전이었다. 제주에 있는 크고 작은 뜨르 중 정뜨르, 진뜨르, 알뜨르는 지면의 굴곡이 특히 적고 광활하다. 그래서 일제강점기 일본군은 이 세 곳에 비행장을 건설했다.
세 뜨르 중 일본군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큰 비행장을 지은 곳은 알뜨르였다. ‘아래에 있는 넓은 들판’이라는 의미의 ‘알뜨르’에 일본 해군의 임시활주로가 만들어진 시기는 1933년이었다. 이후 4년 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은 중국 본토 폭격의 거점으로 알뜨르비행장을 활용했다. 당시 사용했던 20개의 격납고와 급수대, 지하벙커 등이 현재도 남아있다.
알뜨르비행장의 격납고는 멀리서 봤을 때는 그 존재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완만한 둔덕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내부는 당시 일본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제로센(A6M) 한 대가 들어갈 수 있도록 폭 20m, 깊이 15m, 높이 4m의 반원형 공간으로 비워져 있다. 또한, 수직으로 떨어지는 폭탄에도 무너지지 않도록 위에서 누르는 하중을 양쪽 벽으로 분산시키는 아치(Arch)와 이를 앞뒤로 길게 연결한 배럴 볼트(Barrel Vault) 구조가 쓰였다. 동시에 폭탄의 충격파를 흡수하고 멀리서 잘 식별되지 않도록 철근을 촘촘하게 넣은 고강도 콘크리트 구조물 위에 두꺼운 흙을 덮고 풀까지 심었다.
무엇보다 일본군은 숙련된 기술자를 구할 수 없는 당시 상황을 고려해 거푸집을 사용하지 않는 공법으로 격납고를 만들었다. 구체적으로 격납고가 들어설 자리에 흙을 쌓아 언덕을 만든 뒤 그 흙 위에 철근을 배근하고 콘크리트를 타설했다. 그다음 콘크리트가 완전히 굳으면 그 아래에 있던 흙을 파내어 비행기가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 도민들이 강제 동원되었다. 격납고 내부의 비워진 공간의 부피만큼, 제주 도민들의 고통이 겹겹이 채워진 셈이다.
일본군이 알뜨르 외에 정뜨르(現 제주국제공항)와 진뜨르에도 비행장을 만든 이유는 패망이 가까워지면서 본토를 사수하기 위한 마지막 방어기지 중 하나로 제주도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결 7호 작전’이라 불렸던 이 방어 계획에서 ‘제주도’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당시 일본군은 미군이 일본 본토로 진격하기 전에 보급로를 확보하고 항공기지를 만들기 위해 제주도를 점령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본군은 미군의 진격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제주도를 군사 요새로 만들고자 했다. 병력도 7만5000명까지 늘렸다. 다행히, 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기 전에 일본이 항복하면서 제주도가 전장의 중심이 되는 건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누적됐던 군사적 긴장감과 일본군이 남기고 간 대량의 무기들 그리고 당시 일본군에 협력하거나 저항했던 인적 관계 등이 해방 후 제주 4·3사건이 일어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일본이 항복한 뒤 미군이 알뜨르비행장을 접수해 국군훈련소로 사용했다. 지금도 알뜨르비행장의 소유권은 국방부가 가지고 있다. 미군은 일본군이 남기고 간 물자 중 당시 제주도에서 가장 컸던 탄약고를 해체하지 않고 폭파했다. 그 폭발이 얼마나 컸던지, 탄약고가 있었던 섯알오름에는 ‘옴팡’진 웅덩이가 생겼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주에서 ‘예비검속’이 실시됐다. ‘예비검속(豫備檢束)’은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이 있다는 짐작만으로 사람을 사전에 구금하는 조치인데, 그 전신은 일제강점기 일본이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든 ‘조선예방구금령’이다. 예비검속의 대상은 제주 4·3 사건에 연루되었던 사람, 보도연맹 가입자, 정부에 비협조적인 민간인들이었다. 제주에서 예비검속이 시행되면서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촉발된 제주 4·3 사건이 재확산되기 시작했다.
전황이 한국군에게 불리해질수록 예비검속자 수는 늘어갔고, 결국 한림어업조합창고와 무릉지서(支署)에 수용되어 있던 250여명이 섯알오름의 옴팡진 웅덩이에서 사살됐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한국군의 일방적인 패배가 남한에서 북한군을 돕는 빨갱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무능을 가리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섯알오름으로 끌려가던 제주도민들은 자신들이 가는 길을 알리기 위해 고무신을 트럭 밖으로 던졌다. 그래서 지금도 섯알오름 예비검속자 추모비 앞에는 검정 고무신이 놓여 있다. 1950년 8월 20일, 두 차례의 학살이 일어난 이후 섯알오름의 옴팡진 웅덩이는 ‘폭파의 흔적’에서 ‘학살의 터’로 바뀌었다. 슬픔의 땅에 또 한 겹의 비극이 쌓인 셈이다. 웅덩이를 둘러싸고 있는 난간에 서서 그날의 장면을 상상해 본다. 이곳은 인간이 도려낸 ‘인공의 상처’인 동시에, 시대의 비극을 고스란히 받아낸 ‘거대한 공동(空洞·empty)묘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살이 있고 그 다음날 가족들이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학살터로 갔지만 군인들이 막아섰다. 그리고 ‘민간인 출입 통제지역’으로 설정했다. 이후 6년이 지난 1956년, 한림지역 유가족이 61구, 백조일손(百祖一孫) 유가족이 149구의 유골을 수습했다. 그중 132구는 한덩어리로 뒤섞여 있어 어느 유골이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조상이 각기 다른 백서른두 자손이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퀴었으니 한 자손이다”라는 뜻을 담아 ‘백조일손지묘’를 만들었다. 하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은 묘지를 해체하고 위령비를 파괴했다. 희생자들에게 씌워진 빨간 딱지는 67년이 지나서야 떼어질 수 있었다.
제주는 고유한 풍토에 바다를 건너야 갈 수 있다는 특성이 더해져, 뭍과는 다른 세상처럼 인식된다. 차안(此岸)과 피안(彼岸), 현실세계와 이상세계 사이, 그 어디쯤의 장소로 제주를 읽는 이들은 대안적인 삶을 꿈꾸며 이곳을 찾는다. 하지만 ‘한국인데 한국 같지 않은’ 이국적인 이미지만을 소비하기에는 제주가 지닌 역사의 층위가 너무 두껍다. 올해 78주기가 되는 제주 4·3 사건은 그 층위 중에서도 가장 슬프고 아린 상처다. 알뜨르비행장의 격납고와 섯알오름의 학살터를 단순히 비극을 관람하는 ‘다크투어리즘(Dark Tourism)’으로 분류하기 힘든 이유이기도 하다. 비극의 역사를 품은 채 침묵하는 제주의 대지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하는 자세는 풍경 안을 읽어내려는 ‘되돌아봄’이다. 이런 노력 앞에서 제주의 봄은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은, 성찰의 풍경이 된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