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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목과 인간 ‘침묵의 대화’ [유선아의 취미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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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적으로 인간의 관점일 뿐이겠으나 한 사람의 일생보다 수명이 오래되었을 나무를 보면 무엇을 겪고 기억하고 있을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헝가리 영화감독 일디코 에네디의 ‘침묵의 친구’는 오래된 은행나무가 같은 자리에서 세월을 겪어내며 우리 삶의 말 없는 목격자로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과 상상을 그린다. 영화는 독일 소재 대학교의 식물원에 뿌리 내린 한 그루의 은행나무의 시선 아래 1908년과 1972년, 2020년의 각기 다른 시간과 인물의 이야기를 관통시킨다. 대학에 입학한 최초의 여학생 그레테(루나 베들러), 친구가 방학을 맞아 여행을 떠나며 맡긴 식물 실험을 돕게 된 청년 하네스(엔조 브룸), 코로나로 대학 안에서 격리된 채 지내게 된 신경과학자 토니(양조위)의 이야기가 영화 안에서 교차한다. 각각의 챕터는 여성으로서의 자아와 신체를 향한 각성을 이루는 과정, 종을 초월한 우정 혹은 애정, 영장류로서의 인간이 필연적으로 겪는 고독과 교류를 담아낸다.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기는 챕터는 1972년 대학교에서 친구의 식물 실험을 돕는 청년 하네스의 이야기다. 여름날의 초록이 무성한 정원에 누워 책을 읽던 하네스는 자신이 정원의 주인이라고 주장하는 여학생 군둘라를 만난다. 어렸을 적부터 농장에서 자라 식물과 동물을 돌보는 일이 지겹다는 하네스에게 군둘라는 식물 실험을 도와 달라는 제안을 한다. 그가 진행 중인 여러 실험 중 하나에는 창가에 놓인 제라늄 화분이 감지하는 외부 자극을 그래프로 변환해 기록하는 일이 있다. 여름방학을 맞아 친구들과 여행을 떠나 자리를 비우게 된 군둘라는 매일 정원의 식물을 돌보고 사흘에 한 번 제라늄에 물을 주며 그래프를 기록하는 일을 하네스에게 부탁한다. 군둘라는 하네스에게 제라늄과 친해지면 안 된다는 당부를 남기고 여행을 떠나는데 하네스는 호기심으로 점차 제라늄 실험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식물이 인간에게 우정이나 애정 같은 감정을 느낄지도 모른다는 다분히 인간적 관점 아래 놓인 상상은 하네스와 제라늄 사이의 교감을 다룬 챕터에서 증폭된다.

 

첫 장편 ‘나의 20세기’로 데뷔해 이후 ‘더 매직 헌터’, ‘마법사 시몬’을 연출하고 2017년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로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일디코 에네디의 섬세한 상상력은 ‘침묵의 친구’에서 깊이를 더한다. 식물의 생식체계를 종의 의지와 관능, 정념으로 번역하며 인간과는 다른 식물의 시간감을 따라가려는 에네디의 시선은 육안으로 목격할 수 없는 식물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로 이해된다.

 

식물은 말이 없다.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이야기를 상상해 낸 순간에서조차 다큐멘터리를 닮은 끈질긴 관찰의 카메라로 식물과 인간의 형태를 포착하며 마침내 그 안에 담긴 사념의 세계로 들어가고자 한 에네디의 창작적 욕망은 인간의 신경회로를 닮은 식물의 섬세한 줄기를 따라 마침내 가시화된다.

 

유선아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