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정가에서 성범죄자 제프리 엡스타인의 이름이 다시금 떠올랐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영부인 멜라니아가 돌연 생방송 성명을 통해 엡스타인 관련성을 부인하면서다. 멜라니아 여사는 의회를 향해 엡스타인 범죄 피해자들이 증언할 수 있는 공개 청문회 개최까지 촉구했는데, 이는 트럼프 행정부 기조에 배치되는 행보로 주목받고 있다.
멜라니아 여사는 9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생방송으로 진행된 성명 발표를 통해 “나를 그 불명예스러운 제프리 엡스타인과 연관 짓는 거짓말은 오늘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멜라니아 여사는 맥스웰에게 2002년 이메일을 보낸 사실이 드러났고, 조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의 차남 헌터는 엡스타인이 멜라니아를 트럼프 대통령에게 소개해줬다고 주장했다.
멜라니아 여사는 발표에서 “맥스웰에게 보낸 내 이메일 답장은 그저 캐주얼한 서신 교환에 불과하다”고 선을 그었다. 이어 “나는 엡스타인의 피해자가 아니다. 엡스타인이 나를 트럼프에게 소개해주지 않았다”며 “나는 내 남편을 1998년 뉴욕시의 한 파티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주장했다. 멜라니아 여사는 의회를 향해선 “엡스타인에게 피해를 본 여성들을 위해, 생존자를 중심으로 한 공개 청문회를 열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이는 엡스타인 사안을 서둘러 털고 가려는 트럼프 행정부의 기조와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메시지다. 트럼프 대통령 측은 그간 ‘엡스타인 파일’ 논란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여왔고, 지난 2일 취임한 토드 블랜치 법무장관 대행 역시 취임 첫날 “엡스타인 파일은 더 이상 다룰 사안이 아니다”라고 일축했다. 영부인이 되레 의회 청문회를 요구하며 불씨를 다시 키운 모양새다.
AP 통신은 멜라니아 여사의 이날 발표가 “갑작스러운 메시지”라며 “백악관은 물론 워싱턴 정가를 놀라게 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트럼프 대통령과 그의 행정부가 수 주 동안 이목을 독차지했던 엡스타인 논란을 드디어 넘어서는 데 성공한 듯 보였던 바로 그 시점에 나왔다”고 짚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 방송 MS나우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자신은 멜라니아 여사의 성명에 대해 사전에 몰랐다고 말했다고 이 방송이 보도했다. MS나우는 익명의 백악관 대외홍보 당국자를 인용해 많은 백악관 직원들이 영부인의 발언에 당황해했다고 전했다.
갑작스러운 성명 발표의 배경에는 작가 마이클 울프와의 법적 충돌이 거론된다. 트럼프 대통령 전기 작가 출신인 울프는 멜라니아 여사와 엡스타인과의 연관성을 주장해 왔다. 그는 지난해 10월 멜라니아 측이 자신에게 엡스타인 관련 발언을 철회하지 않으면 10억달러가 넘는 소송을 제기하겠다고 위협했다며 맞대응 성격의 소송을 냈다. 미 대중전문지 뉴욕 포스트는 이번 성명을 두고 울프와의 법정과 여론전이 맞물린 상황에서 멜라니아가 여론을 선점하려는 시도라고 분석했다.
멜라니아 여사가 트럼프 행정부의 기존 메시지와 결이 다른 목소리를 낸 것이 처음은 아니다. 영부인실은 2018년 11월 미라 리카델 백악관 국가안보 부보좌관을 겨냥해 “더는 이 백악관에서 봉사할 영예를 누릴 자격이 없다”는 이례적 성명을 내고 사실상 인사 조치를 공개 압박했다. 특히 성명이 발표될 당시 리카델은 루즈벨트 룸에서 열린 행사에서 트럼프 대통령 옆에 서서 미소를 짓고 있어 워싱턴 정가에 미치는 파장이 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