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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스라엘 78년 역사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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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광복의 기쁨을 맛본 한국이 미국의 군정을 거쳐 1948년 정부를 수립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도 1948년 독립국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오랜 기간 외세에 시달린 양국은 즉각 서로를 정식 국가로 승인하고 수교 원칙에 합의했다. 당시만 해도 ‘나라 없는 민족의 설움’이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이 컸을 것이다. 이스라엘은 1964년 서울에 주한 상주 대사관을 개설하며 한국과의 관계 강화에 강한 의욕을 보였다. 하지만 한국으로선 이 같은 이스라엘의 호의에 똑같은 호의로 화답할 수 없었다. 중동산 원유에 에너지 생산을 비롯한 거의 모든 산업을 의존하는 판국에 이스라엘과 절친이 되는 것은 무척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스라엘 국기(왼쪽)와 한국 태극기. 세계일보 자료사진
이스라엘 국기(왼쪽)와 한국 태극기. 세계일보 자료사진

최호중 전 외무부 장관은 1973년 10월 1차 ‘오일 쇼크’(석유 파동) 발생 당시 외무부 통상국장이었다. 이집트·시리아 군대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으로 제4차 중동 전쟁이 터지고 이스라엘에 적대적인 아랍 산유국들이 일치단결하며 국제 유가가 급등했다. 최 국장에게 “한국 정부가 석유 수급을 위해 아랍 지지 선언을 하기로 했으니 이 점을 주한 이스라엘 대사에게 잘 설명하라”는 상부의 명령이 떨어졌다. 훗날 회고록에서 최 전 장관은 “내 전화를 받은 이스라엘 대사는 ‘그게 정말이냐’ 하고 물은 뒤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1973년 오일 쇼크를 계기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명확한 입장을 정했다. ‘한국이 살려면 무조건 석유가 필요하다’는 전제 아래 정부는 1973년 12월 이른바 ‘아랍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무력에 의한 타국 영토 획득은 불가하다’는 전제 아래 이스라엘을 겨냥해 “1967년 당시 점령한 영토에서 철수하라”고 촉구했다. 제3차 중동 전쟁 당시 이스라엘이 빼앗은 골란 고원, 서안·가자 지구, 시나이 반도 등을 모두 반환해야 한다는 뜻이다. 정부는 또 “팔레스타인의 정당한 주장은 존중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1978년 이스라엘은 서울 주재 대사관을 폐쇄하고 주일본 대사관으로 하여금 한국을 겸임하게 했다. 겉으로는 “이스라엘이 1964년 서울에 대사관을 차렸는데도 한국은 상응하는 조치가 없다”는 이유를 들었다. 실은 이스라엘보다 아랍 산유국들을 우선시하는 한국의 외교 정책에 대한 불만 표시였을 것이다.

 

서울 종로구에 있는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모습. 이스라엘은 1964년 서울에 처음 대사관을 개설했으나 이후 한국의 친(親)아랍 정책에 불만을 품고 1978년 대사관 운영을 중단했다. 서울에 이스라엘 대사관이 다시 들어선 것은 1992년의 일이다. 방송 화면 캡처
서울 종로구에 있는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모습. 이스라엘은 1964년 서울에 처음 대사관을 개설했으나 이후 한국의 친(親)아랍 정책에 불만을 품고 1978년 대사관 운영을 중단했다. 서울에 이스라엘 대사관이 다시 들어선 것은 1992년의 일이다. 방송 화면 캡처

한국·이스라엘 관계는 1992년 주한 이스라엘 대사관 재개설, 그리고 1993년 주이스라엘 한국 대사관 개관을 계기로 정상화하긴 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중동의 아랍 국가들 사이에 ‘양다리’를 걸쳐야 하는 한국의 처지는 1970년대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최근 미국·이란 전쟁과 그에 따른 호르무즈 해협 봉쇄로 고유가 시대가 다시 도래하며 한국 경제에 비상등이 켜졌다. 한국이 살려면 무조건 석유가 필요하다는 점은 여전하다. 그렇다고 오직 석유 때문에 옛 친구를 내팽개치거나 홀대하는 것도 부당한 일이다. 이재명정부가 이 딜레마를 현명하게 잘 극복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