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시대 바빌론 왕의 예루살렘 정복 전후를 다룬 베르디의 ‘나부코’는 블록버스터 오페라다. 1842년 밀라노 라 스칼라에서 초연된 이래 그해에만 수십번 공연되었고, 3년 만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지금도 세계 각지에서 공연된 ‘나부코’ 프로덕션은 지난해에만 44개(오페라베이스 기준)에 달한다. 올해도 1월 이탈리아 테아트로 델 질리오를 시작으로 9월 아레나 디 베로나까지 23개의 서로 다른 ‘나부코’가 관객을 만난다. 그리고 그 중 하나인 서울시오페라단·장서문 연출의 ‘나부코’가 지난 9∼12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됐다.
성경에 기반한 고대 유대 민족의 바빌론 유수를 다룬 이 작품에는 동시대성을 부여하기 위한 재해석이 다양하다. 2021년 국립오페라단 공연에서 이탈리아 연출가 스테파노 포다는 위안부 소녀상을 오마주한 연출을 선보였고, 독일 나치를 바빌론에 대입하는 현대적 재해석도 한때 유행했다. 2010년 이스라엘 오페라는 마사다 유적에서 나부코를 공연하며 이스라엘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기도 했다.
서울에서 장서문 연출은 원작이 지닌 서사의 힘을 고스란히 살리는 정공법을 택했다. 외부의 동시대적 상징을 적극 차용해 관객의 시선을 현재로 끌어당겼던 이전 국립오페라단 연출과는 정반대의 선택이다. 서곡부터 막간극으로 바빌론 유수의 맥락을 자막과 함께 해설하고, 중간중간 성경 구절을 장면 표제처럼 제시하면서 종막에 이르기까지 신과 인간, 전쟁과 평화, 사랑과 해방 등 원작이 설파하는 가치관에 충실한 무대였다. ‘새로워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난 이같은 연출은 베르디 대표작으로서 나부코가 가진 아름다움과 장대한 서사가 오롯이 전달되는 무대를 만들었다.
장서문 연출은 작품 속 모든 인물의 운명이 인간의 힘을 넘어선 거대한 질서 속에서 움직인다는 점에 주목했다. 인간의 삶을 하나의 게임에 비유한 체스판과 하늘의 뜻을 상징하는 운명의 수레바퀴를 결합함으로써, 인간과 운명, 권력과 신의 질서가 공존하는 신화적 세계관을 구축했다.
폭과 깊이에서 다른 무대를 압도하는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을 채우는 일은 어떤 장르에든 커다란 도전이다. 무대디자이너 김현정은 직경이 수십 미터는 됨직한 거대한 운명의 바퀴 두 쌍으로 자칫 빈약해질 수도 있는 공간을 장악했다. 두 바퀴가 공중에서 교차하며 무너진 성전의 위태로움을 암시하거나 낮게 내려앉아 왕좌를 감싸듯 권력의 무게를 시각화했다. 때로는 나란히, 때로는 엇갈리면서 바빌로니아 왕국에서 벌어지는 등장인물의 대결과 권력의 압력을 웅변했다.
무대 뒤 배경으로는 영상디자인이 때로는 바빌론 왕국의 밤하늘을, 때로는 신의 분노를 효과적으로 묘사했다. 무용의 전면적인 부각도 이번 나부코의 특징이다. 나부코 등장 장면에서 이십여 무용수의 군무를 필두로, 오페라 무대에서는 보기 힘든 다채로운 무용이 극을 풍성하게 만든다. 무용수가 분한 두 마리 늑대개는 폭력성과 지배자의 분노를 직관적으로 드러낸다.
‘나부코’에서 가장 기대되는 장면은 역시 ‘가라, 상념이여, 황금빛 날개를 타고’다. 3막 유프라테스 강가에서 포로로 끌려온 노예들이 잃어버린 조국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이 합창은 ‘나부코’가 만들어질 때마다 작품 해석의 열쇠로 다양한 이미지를 선사한다. 전통적인 무대에선 유프라테스 강가의 포로들을 거의 움직이지 않는 거대한 집단 정지화면으로 묶어 세워 합창 자체를 하나의 비가이자 장엄한 기억의 풍경으로 보이게 했다. 또 다른 연출에선 회색 폐허와 계단형 구조물 속 군중 이미지로 바뀌어 히브리인들을 현대의 난민과 박해받는 집단의 초상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다양한 장면이 기대되는데 이번 무대에선 전면 양쪽 객석 출구에서 하나둘씩 금빛 베일을 두른 시민합창단이 촛불을 들고 대극장에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됐다. 무대 위 합창단과 함께 노래를 부르며 객석 통로를 가로지른 이들이 밝힌 따스함은 어느새 극장 안을 가득 채웠다. 손에 잡힐 듯 생생한 몰입감으로 객석까지 영원한 약자로 자리매김한 히브리 노예들과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양준모·서선영의 A조와 최인식·최지은을 앞세운 B조가 만든 무대 중에선 B조의 전체적인 조화가 돋보였다. 나부코 왕의 장녀이나 실은 노예의 딸로, 그 출생의 비밀이 극을 움직이는 아비가일레 역은 역대급 난이도를 지닌 오페라 배역이다. 2옥타브에 걸친 음역과 10분 연속 독창을 소화해야한다. 소프라노 최지은은 사랑과 권력 모두를 빼앗길 처지에서 극단적 배신을 통해 야망을 달성하려다 좌절하고, 통한에 잠겨 용서를 구하는 결말에 이르기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노래와 몸에 맞는 옷을 걸친 듯한 연기로 악역임에도 객석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베르디 레퍼토리에 특화된 베르디·비냐스 국제콩쿠르 1위 수상자다운 면모였다.
유대 민족 대제사장 자카리아 역을 맡은 베이스 임채준도 베르디 원곡이 지닌 아름다움을 한껏 끌어올리며 공연 전체의 조화를 완성했다. 특히 민족의 운명을 걸머진 지도자로서 신에게 자신을 도구로 써달라고 기도하는 자카리아의 노래 ‘비에니, 오 레비타!(오라, 레위인이여!)’가 주는 감동이 각별했다. 첼로 선율이 아름다운 편성의 조용하고 깊은 곡이 지닌 매력을 나직하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객석에 십분 전달했다.
위너오페라합창단은 ‘나부코’의 또 다른 주역이었다. 합창을 무대 전면에 끌어들인 첫 오페라로서 이 작품이 지닌 원초적이고 강렬한 음악적 힘을 보여줬다. 히브리 노예의 합창은 물론 4막 대합창 ‘위대한 여호와!’를 통해 감동적인 피날레를 만들었다.
이처럼 아름다운 노래와 효과적인 무대로 완성된 ‘나부코’였지만 무대 밖 현실을 끝내 차단하지는 못했다. 결말에 이르러 이교도의 왕 나부코는 이스라엘의 신 여호와에 귀의하고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한다. 자카리아가 “주께서 나를 통해 새로운 기적을 바라네/이스라엘의 영광을 위해 나를 종으로 삼으시고 불경한 자의 어둠을 물리치시리라”라고 희열에 가득 찬 노래를 부르는 대목에선 어쩔 수 없이 나부코의 무대인 고대 중동, 지금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바로 그 지역 현실이 틈입한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선제 공습으로 시작된 전쟁이 한창인데 이스라엘의 신 앞에 모두가 무릎 꿇는 결말의 환호가 단순한 감동으로 수용되기는 어려운 시절이다. 전쟁 발발은 누구도 예견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입맛이 쓴 건 어쩔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