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사문화한 ‘국가원로자문회의’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지금으로부터 꼭 38년 전인 1988년 4월13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서울 연희동 사저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당시 여당이던 민정당의 명예총재는 물론 헌법 기관인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서도 물러나겠다고 밝혔다.

 

전 전 대통령이 직접 후계자로 지목한 노태우 대통령의 제6공화국이 출범하고 불과 2개월도 안 된 시점이었다. 연일 터지는 5공 비리 의혹 관련 기사들이 국내 일간지 1면을 장식하는 가운데 민정당마저 등을 돌리자 더는 버틸 재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7개월여 뒤인 1988년 11월 전 전 대통령과 부인 이순자 여사는 쏟아지는 국민적 지탄 속에 아예 서울을 떠나 강원 인제 백담사로 옮겼다.

전두환 전 대통령. 사진은 1980년 9월 당시 유신 헌법 아래에서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모습. 그는 퇴임 후에도 막후에서 실세 역할을 할 목적으로 ‘국가원로자문회의’를 신설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전두환 전 대통령. 사진은 1980년 9월 당시 유신 헌법 아래에서 대한민국 제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는 모습. 그는 퇴임 후에도 막후에서 실세 역할을 할 목적으로 ‘국가원로자문회의’를 신설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전 전 대통령의 마지막 공직으로 기록된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은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 제90조에 근거를 뒀다. 국가원로자문회의는 ‘국정의 중요한 사항에 관한 대통령의 자문에 응하는 것이 목적’(90조 1항)으로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은 직전 대통령이 맡는다’(90조 2항)고 돼 있다. 이에 따라 전 전 대통령은 1988년 2월25일 퇴임과 동시에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이 되었는데 그 위세가 대단했다.

 

직원 수도 얼마 안 되는 국가원로자문회의 사무처를 이끄는 사무총장은 장관급, 사무차장 및 의장 비서실장은 차관급 직위로 각각 책정됐다. 오죽하면 민정당 내부에서도 “전 전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을 제치고 무슨 상왕(上王) 노릇이라도 하겠다는 것이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전 전 대통령이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에서 사퇴한 것을 계기로 자문회의는 물론 그 사무처 조직도 폐지됐다.

 

전직 대통령이 수년간 국정을 운영하며 쌓은 경험은 사장(死藏)하는 대신 후임자에 의해 활용되는 것이 마땅하다. 실제로 프랑스는 전직 대통령에게 헌법위원회(한국 헌법재판소 해당) 위원이 될 자격을 부여한다. 전직 프랑스 대통령은 본인이 동의하는 경우 헌법위원회 구성원으로서 국가의 중대 현안에 관해 조언할 권리가 있다. 이탈리아에서 대통령은 임기 만료 후 종신(終身) 상원의원에 취임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 또한 전직 대통령에게 존경의 뜻을 표함과 동시에 복잡한 현안의 해결 과정에서 국가 원로의 지혜와 경륜을 참고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하겠다.

김대중정부 시절인 1998년 7월31일 청와대에서 열린 전·현직 대통령들의 만찬 회동 기념사진. 왼쪽부터 노태우(재임 1988∼1993), 최규하(1979∼1980), 김대중(1998∼2003), 전두환(1980∼1988), 그리고 김영삼(1993∼1998) 전 대통령. 연합
김대중정부 시절인 1998년 7월31일 청와대에서 열린 전·현직 대통령들의 만찬 회동 기념사진. 왼쪽부터 노태우(재임 1988∼1993), 최규하(1979∼1980), 김대중(1998∼2003), 전두환(1980∼1988), 그리고 김영삼(1993∼1998) 전 대통령. 연합

1988년 이후 38년간 국가원로자문회의는 의장도, 자문위원도, 사무총장도 모두 공석인 상태다. 특히 전 전 대통령 이후 대통령 자리를 거쳐 간 이들 가운데 퇴임 후 국가원로자문회의 의장을 지낸 이는 단 한 명도 없다. 국가원로자문회의 설치에 관한 헌법 90조 규정은 완전히 사문화(死文化)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 현재 국회에는 우원식 국회의장 주도로 더불어민주당 등 여야 6개 정당이 공동으로 발의한 개헌안이 계류돼 있다. 원내 2당이자 제1야당인 국민의힘이 반대하는 만큼 헌법 개정이 실제로 이뤄질 것인지는 미지수다. 이왕 개헌을 한다면 국가원로자문회의 설치에 관한 조항을 삭제함이 바람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