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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동칼럼] 추경의 정치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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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發 위기 맞선 26조원 불가피
국채 발행 없이 초과 세수로 충당
역대 정부 추경 남발로 재정 위협
만병통치약 아닌 최후 수단 돼야

미국과 이란 간 종전 협상이 결렬됐다. 이미 전쟁 이전에 배럴당 70달러 안팎이던 국제유가는 100달러를 오르내리고 원·달러 환율도 1500원을 넘나든 지 오래다. 고유가·고환율·고물가 등 중동발 ‘3고’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한국은행도 올해 성장률이 당초 예상치인 2.0%를 밑돌고, 물가는 2%대 중후반으로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중동전쟁이 장기화하면 스태그플레이션(경기침체+물가상승)도 우려될 정도다. 통화정책만으로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때마침 26조2000억원의 추가경정예산이 국회를 통과했다. ‘전쟁 추경’으로 불릴 정도로 급박한 시기라는 점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추경은 속도가 생명이다. 여야가 대승적 차원에서 합의 처리한 만큼 신속한 집행으로 경제 충격을 최소화하는 게 먼저다. 국채 발행 없이 초과 세수로 충당한다고 한다. 편성 과정에서 여야 가릴 것 없이 민원성 증액을 요청하면서 규모가 30조원까지 늘어나려다 정부 원안대로 유지된 것도 반가운 일이다.

김기동 수석논설위원
김기동 수석논설위원

우려스러운 건 ‘중독성’이다. 이번 추경은 이재명정부 출범 이후 두 번째다. 돈도 풀리기 전에 정치권 일각에서 ‘2차 추경론’이 슬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있다. 박홍근 기획예산처 장관이 “일부 언론이 확대해석하고, 야당 일각에서 정치적으로 왜곡·호도하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믿기 힘들다.

위기 때마다 정부가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는 카드가 추경이다. 과거를 되짚어봐도 외환위기 이후 추경은 일상이 됐다. 2015년 이후 2023년과 2024년을 제외하고 매년 1∼2회 편성됐다. 2020년 한 해에는 무려 4차례 추경이 집행됐다. 진보·보수 정부 가릴 것 없이 ‘추경 중독’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다.

추경이 예상치 못한 경제 위기나 대규모 재난 등 긴급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수단임은 분명하다. 팬데믹이나 금융위기처럼 예기치 못한 외부 충격을 방어하기 위한 재정의 역할은 필요하다. 확장적 재정 정책은 고용 유지와 소비 회복에 기여해 왔다.

문제는 ‘명분’이다. 세수가 남아도, 경기가 나빠도, 전쟁이 나도 결론은 ‘추경’뿐이다. 재정이 임기응변식 대응 도구로 전락하는 꼴이다. 국가 재정에 어떤 부담을 끼칠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없다. ‘추경의 정치화’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잦은 추경은 본예산을 ‘양치기 소년’으로 전락시키고 재정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한다. 기존 정부 예산안의 부실을 자인하거나 정치적 의도가 담겼다는 의심을 사는 건 당연하다. ‘위기 대응’이라는 취지는 사라지고, 재정 운용의 예측 가능성을 해치는 동시에 시장에 부정적인 신호만 줄 뿐이다.

이것뿐인가. 나라 곳간도 위험해진다. 지난해 국가채무가 1300조원을 넘었다. 2025년 회계연도 국가결산보고서에 따르면 국가채무는 전년보다 129조4000억원 늘었다. 연 단위 국가채무는 매년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다. 1년 동안 100조원 넘게 증가한 건 2020년, 2021년을 포함해 지난해까지 3개 연도뿐이다.

국가채무 증가율도 11%로 4년 만에 가장 컸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도 급상승했다. 국가채무비율은 지난해 46.0%에서 올해 49.0%로 3.0%포인트 높아졌다. 코로나 사태 영향으로 2020년 5.7%포인트 치솟은 이후 5년 만에 가장 큰 폭 상승이다.

초과 세수를 활용했다고 안심하기엔 이르다. 더 걷은 세금은 부채를 줄이는 데 써야 하는 게 ‘재정 원칙’이다. 세입 증가를 곧바로 지출 확대로 연결하는 것은 결과적으로 국가부채를 늘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재정은 국가 운영의 근간이다. 기축통화국이 아닌 우리로서는 대외의존도가 유독 높다 보니 재정의 지속 가능성이 중요하다. 본예산이든, 추경이든 재원은 결국 세금이다.

추경 자체도 문제이지만, 그것을 너무 쉽게 꺼내 드는 습관이 더 위험하다. 예산은 꼭 필요한 곳에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 추경의 유혹에 사로잡혀 당장의 효과를 위해 무분별하게 사용하는 순간 대가는 국민이 치러야 한다. 추경은 만병통치약이 아닌 마지막 수단이어야 한다. 국민 무서워할 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