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힐=남정훈 기자]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 아무리 뛰어난 기량을 보유하고 있어도, 소속팀 동 포지션에 국가대표 주전인 선배가 자리잡고 있으면 출전 기회를 잡기 힘들다. 이럴 때 후배가 택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다. 주전의 기회를 찾아서 다른 팀으로 옮기던가, 아니면 묵묵히 실력을 쌓으며 선배의 시간이 지나가길 기다리던가. 혹은 팀이 다른 포지션 보강을 위해 트레이드 카드로 활용될 때도 있다.
현대캐피탈 주전 세터 황승빈의 경우엔 세 번째 케이스였다. 2014~2015시즌에 1라운드 5순위로 대한항공에 지명된 이후 2020~2021시즌까지 한선수의 백업 세터로 뛰었던 황승빈은 2021~2022시즌을 앞두고 삼성화재로 트레이드됐고, 드디어 주전 세터의 기회를 얻었다.
다만 주전세터로 도약은 했지만, 역마살이 끼었나. 매시즌 옮겨다녀야했다. 2022~2023시즌은 우리카드에서, 2023~2024시즌은 KB손해보험에서 뛰었다. 그러다 2024~2025시즌에 다섯 번째 소속팀인 현대캐피탈로 오게 됐고, 드디어 우승 세터 반열에 올라섰다.
2025~2026시즌의 황승빈에겐 우여곡절이 많았다. 시즌 초반 부상을 당해 한달 반 가까이를 자리를 비워야 했다. 그 사이 현대캐피탈은 ‘디펜딩 챔피언’답지 않게 휘청거렸다. 3라운드 들어 다시 황승빈이 돌아오자 현대캐피탈은 제 궤도에 오르며 대한항공과 선두 경쟁을 펼쳤다.
6라운드 들어 황승빈의 컨디션이 떨어졌고, 현대캐피탈도 6라운드 막판 13연패 중이던 삼성화재에게 패하며 정규리그 1위 자리를 대한항공에게 내줬다. 이게 결국 부메랑이 됐다.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직행했지만, 후반기 최고의 팀이었던 우리카드와 치열한 혈투를 벌였고 2승으로 챔프전에 올랐지만, 10세트를 치르느라 체력이 고갈됐다.
시즌 막판부터 부침이 심했던 황승빈은 챔프전에서도 기복이 심했고, 결국 현대캐피탈은 ‘로컬룰 논란’ 속에 5차전까지 간 혈투 끝에 패했다. 준우승이 확정된 이후 현대캐피탈 선수단에서 가장 많이 눈물을 훔쳤던 선수가 황승빈이었다. 자신의 부진 때문이라는 자책감에서 흐른 눈물이었다.
그로부터 사흘이 지난 13일, 황승빈은 멀끔한 수트 차림으로 그랜드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2025~2026 V리그 시상식에 섰다. 데뷔 후 처음으로 시상식에 수상자로 참가하게 된 것이다.
올 시즌 부상으로 25경기만 소화했지만, 세트당 11.826개의 세트로 이 부문 1위에 오른 황승빈은 생애 첫 베스트7에 선정됐다.
무대에 오른 황승빈은 “시상식은 늘 누군가를 축하하러 오거나, 맛있는 밥을 먹으러 왔는데...처음으로 수상자로 오게 됐다”고 입을 뗀 뒤 “20대의 어리숙했던 시절에 (한)선수 형을 만나 많이 배웠다. 선수 형은 제게 그림자가 아니라 시원한 그늘이었고, 우러러 볼 수 있는 큰 나무였다. 선수 형처럼 끊임없이 공부하고, 연구하며 성장하고자 하는 열망을 잊지 않는 세터가 되겠다”고 대한항공 시절 코트 너머 뒷모습을 바라봐야했던 한선수를 샤라웃했다.
이날 2022~2023시즌에 이어 생애 두 번째 MVP를 수상한 한선수도 절친한 동생의 샤라웃에 화답했다. 수상 소감 막바지에 다시 마이크를 잡고 “승빈이는 더 발전할 수 있는 선수가 될 겁니다. 파이팅”이라고 짧게 언급한 한선수는 공식 기자회견에서 황승빈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한선수는 “승빈이가 젊을 때 제 백업세터로 뛰던 시절, 잘 어울리고 잘 지냈다. 그때 옆에서 본 승빈이는 의욕도 넘치고, 욕심도 많았던 선수였다. 그때부터 저는 승빈이가 다른 팀에 가면 얼마든지 주전 세터로 뛸 수 있을 것이라고 얘기했다. 지난 시즌 챔프전에서 맞붙어보니 정말 좋은 세터로 성장했더라. 이번 챔프전에서의 패배는 승빈이를 더 강하게 만들어줄 것이라 믿는다”라고 치켜세웠다. 이어 ‘황승빈은 코트 위에서 선수 형을 만나면 그저 쓰러뜨러야 할 적이라고 생각한다던데’라고 묻자 “저도 그렇게 생각해주는 게 더 고맙죠. 저 역시 코트 위에서 승빈이는 싸워서 이겨야할 상대니까. 그게 맞다고 생각한다. 서로 지지 않으려 더 열심히 하는 선후배 사이니까”라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