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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저귀 차고 5시간 운전"…화장실 생겨도 버스 기사가 '5분 컷' 하는 이유 [교통이 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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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시내 장거리 기사들의 고충
‘기본권 지켜주나’ 과거 국민청원
회차지에 화장실…“문제는 따로”
택시운전자 환경 개선 조례안 눈길

“도로에 한 번 나가면 돌아오기까지 5시간이 넘는데, 화장실 같은 인간의 기본권은 시에서 지켜줍니까.”

 

2021년 4월, 당시 정부가 운영하던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시내버스 운전기사입니다’ 제목의 글이 올라왔다.

 

서울 은평구에서 서초구까지 약 60㎞ 거리를 달리는 742번 버스 기사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이 청원은 높은 운전 피로도와 휴식 시간조차 보장받기 어려운 장거리 노선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호소하며 많은 누리꾼의 공감을 샀다. 서울시는 서리풀터널 개통으로 같은 해 1월 742번의 운행 거리를 47.3㎞에서 10㎞ 연장했다.

 

장거리 시내버스 운전기사들의 고충을 담은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온 2021년, 서울 서초구가 서리풀문화공원 인근에 조성한 공중화장실. 김동환 기자
장거리 시내버스 운전기사들의 고충을 담은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온 2021년, 서울 서초구가 서리풀문화공원 인근에 조성한 공중화장실. 김동환 기자

 

서초구가 관내를 경유하는 장거리 버스 운수종사자들이 회차지에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그해 5월 서리풀문화광장에 정류소와 화장실을 조성하면서 기사들의 열악했던 근로 조건에는 조금이나마 숨통이 트였다.

 

하지만 5년이 흐른 지금 현장의 상황이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회차지에 화장실이라는 하드웨어는 갖춰졌으나, 기사들은 여전히 5분 남짓한 짧은 시간 안에 휴식과 생리적 현상을 모두 해결해야 하는 처지다.

 

지난 14일 오전 11시쯤, 서울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앞 정류장에서 742번 버스에 올라 회차지인 서리풀문화광장까지 직접 이동했다. 노량진역과 상도동 등을 거쳐 50여분을 달린 끝에 버스는 회차지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기사는 5분여의 휴식 후 곧바로 다시 차를 움직여야 했다. 이 버스를 포함해 20분간 3대를 회차지에서 지켜봤다. 뒤이어 도착한 두 대의 기사들은 화장실을 다녀왔고, 그동안 차 안에서는 출발을 기다리는 승객 서너명도 눈에 띄었다.

 

장거리 시내버스 운전기사들의 고충을 담은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온 2021년, 서울 서초구가 서리풀문화공원 인근에 조성한 공중화장실. 김동환 기자
장거리 시내버스 운전기사들의 고충을 담은 청와대 국민청원이 올라온 2021년, 서울 서초구가 서리풀문화공원 인근에 조성한 공중화장실. 김동환 기자

 

현장에서 만난 기사 A씨에게 회차지 환경 변화에 대한 생각을 묻자, 그는 “(화장실이라도) 생겨서 좋기는 하지만 정말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고 답했다.

 

국민청원으로 장거리 기사들의 애환이 공론화되면서 간이 화장실이 마련되기는 했으나, 시설 확충일 뿐 기사들이 처한 실질적인 상황은 5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설명이다.

 

A씨는 “그때나 지금이나 5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상황에서 회차지에 도착해도 잠시만 쉬고 바로 나가야 한다”면서, 서울시에서 (노선 길이 단축 등) 얘기가 나온 것으로 알지만 별다른 조치도 없고 지방선거를 앞두면서 향방도 불투명해진 것 같다고 토로했다.

 

당국의 보직 순환 등으로 개선안이 논의될 시점이 되면 이야기가 다시 흐지부지되는 현상도 A씨는 문제로 지적했다. 왕복 5시간 코스면 산술적으로 절반인 2시간 반 만에 회차지를 통과해야 한다는 점을 언급한 후, 그는 기사들이 느끼는 피로감이 너무나 크다고 덧붙였다.

 

2021년 4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왔던 ‘시내버스 운전기사입니다’ 제목의 청원글. 이 글은 ‘도로에 한 번 나가면 돌아오기까지 5시간이 넘는데, 화장실 같은 인간의 기본권은 시에서 지켜주나’라고 물어 많은 누리꾼들의 공감을 샀다. 청와대 국민청원 페이지 캡처
2021년 4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왔던 ‘시내버스 운전기사입니다’ 제목의 청원글. 이 글은 ‘도로에 한 번 나가면 돌아오기까지 5시간이 넘는데, 화장실 같은 인간의 기본권은 시에서 지켜주나’라고 물어 많은 누리꾼들의 공감을 샀다. 청와대 국민청원 페이지 캡처

 

장거리 운행 버스 기사들의 고충은 비단 이 노선만의 일이 아니다. 742번 버스 기사의 청원 당시 경기도와 서울을 오가는 광역버스 기사들의 휴식권 보장 문제도 일부 매체에서 언급된 바 있다.

 

왕복 100㎞에 달하는 노선을 운행하던 광역버스 기사 B씨는 화장실 이용이 어려워 기저귀를 준비할 정도라며 노동당국에 신고를 하기도 했다.

 

회사 측은 일부 사례를 제외하면 근무 시간이 8시간을 넘지 않는다고 언론에 해명하면서도, 휴게 시간 보장으로 인해 운행 횟수가 줄어들면 시에서 받는 재정 지원금이 삭감될 수 있다는 경영상의 속사정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처럼 버스 기사들의 기본권 논의가 정체된 사이, 서울시의회에서는 택시운전자들의 환경 개선을 위한 조례 개정안이 통과해 눈길을 끈다.

 

‘서울특별시 주차장 설치 및 관리 조례’ 개정안에 따르면, 택시 운수종사자가 화장실 이용을 목적으로 시장이 관리하는 공영 노외주차장에 입차할 경우 30분 이내에 한해 주차 요금을 면제받는다.

 

최호정 서울시의회 의장은 “택시운전자분들은 시민의 발이지만 정작 본인의 기본적인 휴식조차 보장 받기 어려웠다”며 “이번 조례 개정은 작은 변화지만 현장에서 체감할 수 있는 불편을 줄이고 더 안전한 운행 환경을 만드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조례는 지난달 30일부터 시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