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커힐=남정훈 기자]대한항공의 코트 위 야전 사령관 한선수(41)는 4년차였던 2010~2011시즌에 팀에게 V리그 출범 후 첫 정규리그 우승을 선물했다. 신영철 감독(現 OK저축은행)의 지도 아래 김학민(現 IBK기업은행 코치)가 토종 주포로 활약했고, 곽승석이 신인으로 데뷔한 시즌이었다. V리그 출범 후 삼성화재, 현대캐피탈에 밀려 ‘만년 3인자’ 이미지가 강했던 대한항공은 그해 25승5패를 기록하며 챔프전에 직행했다.
통합우승의 기대감이 컸지만, 챔프전 상대는 ‘거함’ 삼성화재. 준플레이오프(VS LIG손해보험 2승1패), 플레이오프(VS 현대캐피탈, 3승무패)를 뚫고 올라온 삼성화재를 상대로 압도적인 체력적 우위가 있었지만, 결과는 삼성화재의 4전 전승, 챔프전 4연속 우승이었다. 그렇게 대한항공의 첫 챔프전은 허무하게 끝났다. 이후 2011~2012, 2012~2013시즌에도 대한항공은 챔프전에 올랐지만, 연거푸 삼성화재에게 막혀 3연속 준우승에 머물렀다. 3년 연속 챔프전 진출을 통해 3인자 이미지는 떨쳐냈지만, 삼성화재 왕조 치하 속에 대한항공의 챔프전 우승은 요원해보였다.
그때 한선수는 알았을까. 15년이 지난 뒤, 자신의 손가락에는 여섯 개의 우승 반지가 끼어져있고 정규리그 MVP 트로피도 두개나 갖게 된다는 것을. 그것도 불혹을 넘긴 나이에. 20대 한선수가 무참하게 깨졌던 실패의 경험이 30대 중반 이후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는 자산이 된 셈이다.
한선수는 지난 13일 서울 광진구 그랜드 워커힐 서울에서 열린 2025~2026 V리그 시상식에서 기자단 투표에서 15표를 받아 11표를 얻은 팀 동료인 정지석을 제치고 정규리그 MVP를 차지했다. 2022~2023시즌에 이은 두 번째 수상이다. 첫 번째 MVP 때도 최고령 기록을 세웠던 한선수는 자신의 기록을 3년 만에 다시 한 번 깨뜨렸다.
수상 후 무대에서 “아직까지 현역으로 뛰고 있는 노장 한선수”라고 스스로를 소개한 한선수는 “조원태 구단주를 비롯해 동료 선수들, 감독, 코치진, 트레이너, 프런트 등 모든 분들이 있어 올 시즌 통합우승을 이뤘고, 제가 대표로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시즌 끝까지 함께 하지 못한 카일 러셀과 이가 료헤이에게도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고 소감을 밝혔다.
지난 시즌 다소 부진했던 한선수가 다시 일어날 수 있었던 건 헤난 감독의 강훈련 덕분이다. 한선수도 “‘호랑이’ 헤난 감독님이 끝까지 밀어붙여서 저를 만들어주신 건 같다. 저 역시 핑계대지 않고 끝까지 달렸다. 내년까지 계약이 되어 있기에 내년에도 몸을 100%로 만들겠다”라면서 “챔프전 우승 6회를 이뤘는데, 벌써 7번째 우승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라고 각오를 다졌다.
시상식을 마치고 공식 기자회견에서 한선수는 더 솔직한 마음을 전했다.
3년 전 첫 MVP 수상과 두 번째 MVP를 비교해달라고 묻자 한선수는 “(정)지석이가 부상 없이 다 뛰었다면 지석이가 받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석이가 챔프전 MVP를 받아서 정규리그 MVP에 욕심을 내볼까 생각은 했지만, 받게 될 줄은 몰랐다. 경사가 났다. 올 시즌 어려운 일이 많았는데, 엔딩엔 우승도 하고, 상도 받고...참 행복한 시즌이다”라고 다시 한 번 소감을 밝혔다. 이어 “3년 전 MVP보다는 지금이 더 값진 것 같다. 지금은 그저 한 경기, 한 경기 뛰는 것만 해도 정신이 없다. 몸 관리를 하면서도 시합을 또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이번 수상이 더 값진 것 같다”고 덧붙였다.
2023~2024시즌을 마치고 3년 계약을 체결한 한선수는 계약을 1년 남겨두고 있다. 그 이후의 그림은 그렸을까. 한선수는 “아직 이후의 계획은 세우진 않았다. 그저 1년, 1년에 올인하며 다음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우선 내년만 바라보고 가야할 것 같다”라고 답했다.
20대 시절 3연속 챔프전 고배를 마셨던 한선수는 34살이었던 2017~2018시즌에야 첫 챔프전 우승을 차지했고, 이후로 다섯 개의 우승 트로피를 추가했다. 그 비결에 대해 묻자 “저랑 같이 동고동락했던 선수들이 경력이 쌓이고, 노하우가 쌓이면서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 같다”라면서 “젊을 땐 몸은 좋았지만, 경험은 없었다. 챔프전은 이기든, 지든 경험으로 쌓인다. 젊을 때 패배의 경험을 자양분 삼아서 성장했고, 결국 첫 우승을 해내고, 이후에 더 우승을 할 수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기사 첫 머리에 소개한 한선수 생애 첫 챔프전의 4전 전패의 아픔도 지금의 한선수에겐 웃으며 말할 수 있는 경험이 됐다. 그는 “그 경험 역시 성장의 발판이 됐다. 실패와 좌절이 제일 좋은 성장의 자양분이라고 생각한다. 젊은 선수들이 실패나 이런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안 된다고 멈추지 말고, 계속 하면 결국 자기 것이 생긴다”라고 답했다.
분위기가 한선수 교수의 세터학 개론 강의로 흘렀다. 좋은 세터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느냐 질문을 받자 한선수는 “토스를 잘 해야죠”라고 농을 던진 뒤 “토스 정확도나 경기 운영 능력도 중요하지만, 자기 감정에 흔들리지 않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다. 자기 플레이에 대해 냉정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세터에 잘 어울리는 성격을 가진 것 같다”면서 “젊은 세터들이 생각은 너무 많이 하지말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라고 강조했다.
평소 태극마크에 애착이 워낙 큰 한선수다. 올해는 한국 남자배구에 중요한 대회들이 몰려있다. 9월에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리는 아시아선수권에는 2028 LA올림픽 직행 티켓도 걸려있다. 이어 나고야 아시안게임도 열린다. 인기 침체에 빠진 남자배구가 다시 한 번 영광을 찾기 위해선 이번 국제대회에서 사활을 걸어야 한다. 제의가 온다면 다시 태극마크를 달겠냐고 묻자 “저는 언제나 얘기해왔다. 대표팀이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 가겠다고. 젊고 좋은 세터들이 많지만, 제가 도움이 돼 뽑힌다면 최선을 다 할 것이다. 어릴 때부터 꿈이 국가대표였기에 대태극마크를 달면 항상 자긍심을 느낀다. 저는 대표팀에서도 많이 성장했다. 뽑아준다면 주저않고 대표팀에 합류하겠다”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