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줄 위의 희망/제임스 A 그라임스/이민철 옮김/코뮤니옹/2만3000원
출처:위키피디아
전쟁은 인간의 삶을 파괴하지만, 때로는 그 폐허 위에서 가장 인간적인 가치가 드러난다. ‘네 줄 위의 희망’(원제: 희망의 바이올린)은 그간 한 번도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던 홀로코스트 시기의 음악을 다룬 이채로운 작품이다. 미국의 음악학자이자 작가인 제임스 A 그라임스는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비극인 홀로코스트와 아름다운 현악기 바이올린을 통해, ‘홀로코스트’와 ‘음악’이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단어가 공존했던 비극의 역사를 조명한다. 동시에 바이올린을 매개로, 극한의 시대 속에서도 이어진 인간의 삶과 음악의 드라마를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바이올린은 수세기 동안 유대인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온 악기다. 이 악기에는 유대인의 민족혼이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때문에 나치 독일은 유대 민족뿐 아니라 그들의 문화유산까지 말살하려 했다. 홀로코스트 시기 유대인의 바이올린은 수용소와 게토를 거치며 주인을 잃거나 사라지고, 도둑맞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운 좋게 남았더라도 연주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손상된 경우가 많았다. 저자는 세계 곳곳에 흩어진 생존자들의 바이올린을 추적하며, 각각의 악기에 깃든 사연을 복원해낸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이 아니라 집단적 기억이자, 결코 잊혀서는 안 될 역사적 증언이다.
책에 따르면 홀로코스트 시기 어떤 음악가를 남길지, 어떤 음악가를 배제할지는 전적으로 ‘제국 음악원’의 판단에 달려 있었다. 이 기관은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가 만든 ‘제국 문화원’ 산하 조직으로, 독일 내 모든 음악 활동을 관리·감독했다. 제국 음악원은 독일 음악의 우월성을 강조하며 바흐, 베토벤, 브람스, 하이든, 모차르트, 바그너 등 이른바 ‘순수 독일 음악’만 연주하도록 강제했다. 반면 재즈나 무조 음악, 말러·멘델스존·마이어베어 등 유대인 작곡가의 작품은 ‘퇴폐 음악’으로 규정해 철저히 금지했다. 음악뿐 아니라 연주자까지 통제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바이올린을 손에 쥐었던 사람들의 내면은 복잡했다. 연주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활을 들었지만, 그 선율은 때로 자신을 죄인처럼 느끼게 했다. 음악은 위로이면서 동시에 고통을 증폭시키는 장치이기도 했다. 저자는 이 모순을 과장하지 않고, 다양한 증언과 기록을 통해 차분히 드러낸다. 그 결과 독자는 단순한 동정이나 연민을 넘어 인간 존재의 복잡성과 비극성을 깊이 체감하게 된다.
책 곳곳에는 바이올린이 겪은 수난이 기록돼 있지만,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은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다룬 3장 ‘아우슈비츠의 바이올린?모순된 아름다움’이다. 수용소와 음악이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두 세계의 기묘한 공존이 드러나는 장면이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음악을 통해 수용소 관리자들과 가까워진 것보다, 그들을 직접 감시하던 나치 친위대원들과 인간적인 유대를 형성했다는 점을 더 크게 느꼈다. 단원들은 이들을 ‘에스맨(S man)’이라 불렀다. 음악, 특히 좋아하는 곡을 들을 때 그들은 놀라울 만큼 인간적인 모습을 보였다. 목소리는 부드러워지고, 태도는 다정해졌다. 어떤 이는 선율 속에서 연인이나 가족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을 잃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겨났다. 그러나 동시에 의문이 남는다. 음악을 사랑하며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사람들이 어떻게 그토록 잔혹한 일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
책에 등장하는 바이올린들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데에는 이스라엘의 현악기 장인 암논 바인슈타인의 노력이 컸다. 그는 1980년대, 아우슈비츠에서 연주했던 한 생존자가 수리를 맡기러 찾아온 일을 계기로 ‘희망의 바이올린(Violins of Hope)’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전쟁 속에서 주인을 잃고 파손된 악기들을 수집하고 복원하는 작업은 결코 쉽지 않았다. 대부분의 바이올린은 심하게 훼손돼 연주가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정성껏 악기를 복원하고, 가능하면 원래의 주인을 찾아주었다. 이렇게 되살아난 바이올린들은 다시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지며, 세계 곳곳에 홀로코스트의 기억을 전하는 매개가 되었다. 이 책은 바로 그 여정을 기록한 결과물이다.
책은 바이올린에 관한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인간에 대한 기록이다. 가장 비인간적인 시대 속에서도 사람들은 음악을 통해 자신을 지키려 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일화는 음악이 인간에게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하게 한다. 흔히 예술은 현실과 동떨어진 것으로 여겨지지만, 생존조차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조차 사람들은 음악을 찾았다. 그것은 존엄을 지키고 살아남기 위한 힘이었다. 결국 이 책은 말한다. “음악은 사치가 아니라, 인간이 인간으로 남기 위한 마지막 언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