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라 핀스커 ‘오늘은 모든 게 닫혀 있다’(‘로스트 플레이스’에 수록, 정서현 옮김, 창비)
매일 글을 쓰지는 못해서 가능하면 소설에 대해서 날마다 생각하려고 한다. 얼마 전에는 노트에다 소설이란? 하고 써보았다. 생각은 하기도 중요하지만 문장으로 정리하기 역시 그렇다고 느끼기에. 그러곤 이렇게 이어 적었다. 소설은 두 가지 면에서 둘 이상을 뜻하는 복수(複數)의 장르가 아닐까, 라고. 첫 번째는 쓰는 이와 읽는 이, 둘 모두에게 의미가 있어야 하고, 두 번째는 중심인물 외 그에게 영향을 끼치고 변화시키게 하는 존재는 보조 인물이어서. 사람은 “관계적 존재”라 그런 문장을 썼는지도 모르겠다. 혹은 세라 핀스커의 ‘오늘은 모든 게 닫혀 있다’를 읽고 난 후라서였을까.
좋은 SF 단편소설을 만나면 먼저 상황을 눈여겨보게 된다. 인물들이 그 특별한 상황에서 무슨 선택과 행동을 하게 될지 기대하게 돼서. 사서가 될 꿈으로 지금은 작은 마을의 도서관에서 시간제 보조로 일당을 모으고 있는 메이는 여느 때처럼 퇴근하고 집에 와선 뜻밖의 뉴스를 접하게 됐다. 야구 경기장에서의 폭발 사고. 사망자 수는 끔찍했다. 같이 사는 친구가 이런 소식도 전했다. 안전한 곳으로 대피해서 “각자의 자리에 가만히” 있으라고 정부에서 지시했다고. 다른 위협이 있을지도 몰라서. 뉴스는 멈췄고 소셜미디어 사이트 모두 로딩되지 않았다.
버스도 운행하지 않아 다음날 메이는 걸어서 출근했다. 도서관에 휴관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노숙인 이용자들도 많고 출근하느라 아이를 맡기는 부모들도 있는데. 라디오에서 메이는 “위협으로 인한 휴무” 기관의 목록을 들었다. 학교, 쇼핑몰, 법원. 거기에 도서관은 없었다. 상사에게 전화해 휴관의 이유를 묻자 공용 컴퓨터 때문이라고 했다. 그걸 쓰지 못하게 하려는 거라고. 문을 열 책임을 느끼면서도 시간제 보조인 자신이 받을 수 없는 일당 걱정 역시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제와는 다른 두려움이 커지기 시작했다. 햇살이 가득한 봄날에.
같은 건물에 사는 십 대 소녀들이 1층 계단참에서 휴대전화로 뭔가를 보고 있었다. 학교에 갈 수 없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는 소녀들이. 뉴스에서는 계속해서 위협을 보도하지만 맞서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왜 시민들에게 집에만 머물러 있으라고 하는지, 왜 거의 모든 상점과 건물들이 문을 닫아야 하는지 명확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메이는 궁금해졌다. 하루치 식비나 고지서, 임대료 걱정에 푼돈을 세고 또 세며 힘겹게 버티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현관 앞에서 소녀들을 또 보았을 때 메이는 물었다. 스케이트보드 타본 적이 있느냐고. 사실 그건 불쑥 던진 질문이 아니었다. 자신이 이 상황에서 뭘 해야 할지 알고 싶어졌으니까.
그 두 자매 외에 학교에 가지 못하는 십 대들은 동네에 많았다. 메이가 풀밭에서 자매에게 스케이트보드에 서서 균형 잡는 법을 가르치고 있자 그런 청소년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며칠 후에는 열두 명이 되었다. 사고로 스케이트보드를 타지 않게 된 메이는 매일 그들에게 자신이 좋아했던 스케이트보드를 잘 넘어지면서 타는 법을 가르치게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어른은 그들을 안전하게 지킬 책임이” 있다고 알아가면서. 소셜미디어가 작동하지 않자 청소년들과 메이의 옆 사람들은 이제 ‘옛날 방식’, 메이가 진짜라고 믿는 손편지, 메일, 라디오, 자전거, 스케이트보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터무니없이 높은 배달비와 임대 사무소의 연체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메이와 친구, 아이들은 질문하고 대화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가 뭘 할 수 있을까?
스케이트보드를 타는, “시민 참여 방법”에 관심을 두게 된 성장하는 소녀들과 그 아이들 덕분에 더 많은 할 일을 찾은 메이. 그들의 이야기에는 이것이 보인다. 좋아하는 일을 책임감 있게 가르치려는 사람과 질문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과 자세히 보려고 하고 돕고 싶어 하는 사람이. 그것이 힘든 한 시기를 서로 건널 때 필요한, 늘 필요한 어른의 자세가 아닐까. 오늘은 아직 모든 게 ‘닫혀’ 있어도 마음은 ‘열려’ 있으니 어쩌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내일은.
조경란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