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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공동체의 이야기가 더 절실한 시대”… ‘빌리 엘리어트’ 연출가 스티븐 달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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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 ‘빌리 엘리어트’ 한국 개막 공연을 봤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보다 보니 제게도 감정이 벅차오르는 경험이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 배우들이 정말 훌륭했습니다. 이 작품은 모든 배우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주 많은 공연인데, 안무와 움직임이 매우 정교했고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무자비한 구조조정이 단행되던 80년대 영국 탄광촌. 우연히 발레를 접한 소년이 가족과 사회의 편견에 맞서 자신의 재능과 꿈을 펼쳐나가는 영화·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만든 연출가 스티븐 달드리가 한국에 왔다. 5년만에 네번째 시즌을 시작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를 응원하기 위해서다. 첫 장편영화 ‘빌리 엘리어트’(2000)로 이름을 알린 후 연극·영화에서 여러 명작을 만들며 오스카 감독상 후보에만 세번 오르고 토니상 연출상을 여러 차례 받은 거장의 첫 방한이다.

 

영화·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연출가 스티븐 달드리. “우리가 더 파편화될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함께 모여 음악과 춤, 연극과 이야기를 경험하고 싶어 한다”며 공동체와 그 속의 연대가 지닌 중요성을 강조한다. 신시컴퍼니 제공
영화·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연출가 스티븐 달드리. “우리가 더 파편화될수록 사람들은 오히려 함께 모여 음악과 춤, 연극과 이야기를 경험하고 싶어 한다”며 공동체와 그 속의 연대가 지닌 중요성을 강조한다. 신시컴퍼니 제공

13일 서울 종로에서 기자들과 만난 달드리는 유쾌한 어조로 “오랫동안 한국에 꼭 오고 싶었다. 그런데 한 번도 기회가 닿지 않았다. 전적으로 일 때문이었다”며 “한국에 대해 많이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알고 있는 한 가지는 전쟁 이후 한국이 놀라울 만큼 성공적이고 매우 빠른 산업화를 이뤘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런 여러 산업적 이동과 단계들을 거쳐 오는 과정은 대단히 성공적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어떤 노동 영역들은 곧바로 불필요해지기도 했다는 뜻이기도 하죠. 그래서 공동체의 감각이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어떤 산업이 사라지고 다음 산업이 도착하기 전까지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라는 측면에서, (지역 공동체의 해체를 다루는) ‘빌리 엘리어트’는 한국에서도 어떤 울림을 가질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파업 탄광촌에서 피어난 무용 천재를 응원하는 동네 사람들 모습과 함께 인상적인 장면이 여럿인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도 가슴 뭉클한 대목은 피날레다. 런던 한 극장에서 성인이 된 빌리(아담 쿠퍼)가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무대에서 도약한다. 전통을 뒤집어 남성 무용수로 채운 야성의 백조 군단에서 편견을 극복한 빌리의 아름다운 비상을 본 아버지는 말없이 눈물을 흘린다.  이 장면에 대해 “당시 매튜 본의 ‘백조의 호수’ 첫 공연이 시작된 때였는데 ‘소년이 백조가 된다’는 이미지는 완벽한 엔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며 “마침 매튜가 제 친구였기에 기꺼이 장면 도입을 승낙받았다”고 회고했다. 영국 팝의 전설 엘튼 존도 달드리의 또 다른 친구다. 기자회견 당일에도 엘튼 존과 통화했다는 달드리는 “한국에서 이 작품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 그 역시 큰 관심을 보였다”며 “한국 공연이 얼마나 훌륭했는지 엘튼 존에게도 말해줬다”고 소개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신시컴퍼니 제공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신시컴퍼니 제공

영화 개봉 5년 후 뮤지컬로 ‘빌리 엘리어트’를 옮기면서 달드리는 분열을 치유하려는 탄광촌 공동체의 노력에 더 많은 초점을 맞췄다. 그는 “빌리 한 사람이나 그 가족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는 공동체 전체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그것이 뮤지컬을 만든 분명한 목표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했다.

 

“영국 역사로 보자면 1984년은 영국이 후기 산업 국가로 이동하던 시기였습니다. 우리는 제조업을 없애버렸고, 광부들도 그 과정의 일부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영국은 아무것도 만들지 않고 금융업만 합니다. 그리고 이 작품이 다루는 광부들의 파업은 마지막 남은 강력한 노동조합들, 전국광부노조, 그리고 석탄 산업의 종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일에 헌신했던 공동체들이 무시당하고, 버려지고, 잊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의 결말은 탄광촌 공동체와 그 산업에 대한 애가(哀歌)다. “소년은 런던의 로열 발레 학교로 갈 기회를 얻지만, 공동체는 파괴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에 광부들이 내려가는 모습은 마치 그들 자신의 은유적인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올해 첫 공연이 끝난 4월 12일 서울 용산 블루스퀘어 무대에서 연출가 스티븐 달드리가 출연·제작진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신시컴퍼니 제공
뮤지컬 ‘빌리 엘리어트’ 올해 첫 공연이 끝난 4월 12일 서울 용산 블루스퀘어 무대에서 연출가 스티븐 달드리가 출연·제작진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신시컴퍼니 제공

영국을 대표하는 이 연출가는 늘 공동체의 균열과 살아남은 연대를 집요하게 포착해왔다. 한 개인의 성장이나 상처를 단독의 드라마로 밀어붙이지 않고 그 인물을 둘러싼 가족과 마을, 그리고 기억과 역사까지 함께 끌어들여 이야기를 펼쳐왔다. 영화 ‘디 아워스’(2002)에선 서로 다른 시대의 여성들을 통해 정서적 연대를 더듬었고 ‘더 리더’(2008)는 전후 독일 사회가 짊어진 죄책과 기억의 문제를 개인 관계 속으로 끌어들였다. 드라마 ‘더 크라운’(2016∼)에선 왕실이라는 제도를 단순한 권력 구조가 아니라 국가와 가족, 전통과 의무가 충돌하는 거대한 공동체의 장으로 다뤘다. 그처럼 ‘공동체’를 늘 다루는 것에 대해 달드리는 “공동체가 함께 모이는 이야기, 동료들이 함께 모이는 이야기는 지금 더욱 들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지금 우리는 점점 더 파편화되고 사람들은 더 고립감을 느끼고 있다”고 설명했다.

 

“점점 더 서로에게서 고립되고 공동체라고 상상해온 것들이 무너지는 시대이지만 사람들은 극장에 가고 싶어 합니다. 사람들이 함께 모여 무언가를 보고 함께 경험할 수 있을 때, 그 경험은 오히려 더 중요해지고 더 강력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더 파편화될수록 사람들은 함께 모여 음악과 춤, 연극과 스토리텔링을 경험하고 싶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