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노비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대중은 흔히 드라마 <추노>의 강렬한 이미지를 연상한다. 끈질기게 뒤쫓는 추노꾼, 붙잡힌 노비의 얼굴에 새겨지는 치욕스러운 자자(刺字), 혹은 주인에게 복수하고자 ‘살주계’를 조직하는 극단적 장면을 떠올리곤 한다. 이는 역사의 극적인 단면일 뿐이다. 대다수 노비는 복종과 저항의 미묘한 경계선 위에서 영리한 생존전략을 구사했다.
그 생생한 일상이 16세기 양반 관료 이문건(李文楗)이 남긴 《묵재일기(默齋日記)》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내다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20여 년간 유배 생활을 했던 그는, 일기에 자신을 둘러싼 주변 세계를 세밀하게 기록했다. 특히 노비 관리에 대한 깊은 고뇌가 드러난다.
이문건 가문의 노비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상전에게 복종하도록 교육받았다. 어길 시에는 곧바로 체벌이 뒤따랐다. 이들이 주인의 뜻대로 ‘충직한 노비’로만 자란 건 아니다. 노비들은 주인에게 갖춰야 할 예의뿐만 아니라, 부당한 처우에 맞서 자신을 보호하는 법도 함께 터득해 나갔다.
이문건의 손자 숙길은 나이가 어린 노비 유복과 만성을 장난감 취급하며 수시로 괴롭혔다. 어느 날, 숙길이 유복을 때리는 장면을 본 노비 억복(유복의 형)이 고자질했다. 돌아온 것은 이문건의 매서운 회초리였다. 아무리 어린 상전이라 할지라도 노비가 상전의 허물을 고자질하는 일은 금지되었다.
노비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며칠 뒤 만성이 다시 숙길에게 맞아 울음을 터뜨리자, 이를 지켜보던 노비 귀손이 숙길의 막대기를 빼앗아버렸다. 화가 난 숙길은 할머니에게 달려가 일러바쳤고, 귀손은 결국 매질을 당해야 했다. 주목할 점은 노비들이 체벌을 예상하면서도 상전의 부당한 폭력에 대해 물리적 저항을 선택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당시 노비들은 어떤 체벌을 받았을까?
이문건은 노비의 태만이나 불손에 대해 철저히 매로 다스리는 원칙주의자였다. 그는 “성내며 입으로 질책하는 것보다 때에 맞춰 회초리를 치는 것이 낫다”는 확고한 체벌관을 지녔었다. 그러나 매질은 결코 능사가 아니었다. 과도한 체벌은 노동력의 손실인 '노비 도망'으로 직결되었다. 상전인 이문건은 체벌의 이유와 강도를 고심하며 늘 수위를 조절해야 했다.
한번은 노((奴·남자 종) 귀손이 비(婢·여자 종) 의금을 희롱하여 집안이 소란스러웠다. 추궁당하던 귀손은 “도령님(숙길)이 시켜서 한 일”이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귀손은 결국 소란을 피운 죄로 어깨 50대, 의금은 종아리 20대를 맞았다. 귀손은 “죄도 없이 매를 맞았으니 도망치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일종의 허세였으나 상전 이문건은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다음 날 이문건은 귀손을 조용히 불러 훈계하며 달랬지만, 일기에는 “귀손이 겉으로만 알아듣는 척할 뿐 오래 사환할(일할) 뜻이 없다”며 씁쓸한 속내를 남겼다.
이문건의 아내 안동 김씨 역시 노비 통제의 어려움을 토로하곤 했다. 병든 환자 곁에서 떠든 비 주지를 꾸짖으면서도, 내심 ‘혹 나쁜 마음을 먹고 도망칠까 두렵다’며 한탄했다. 실제로 비 유덕은 벌을 받을까 봐 무서워 야반도주했다가 다음 날 붙잡혀 왔고, 비 옥춘은 매를 맞은 뒤 분을 참지 못해 이웃집으로 숨어들었다가 주인 손에 끌려 돌아왔다. 이처럼 꾸중과 체벌 뒤에는 늘 ‘도망’에 대한 주인의 불안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조선시대 상전들에게 권장된 이상적인 노비 관리법은 ‘은위병행(恩威竝行)’이었다. 은혜를 베풀어 마음을 얻되, 위엄을 갖춰 제재하는 균형 감각을 의미한다. 이문건 역시 이 원칙을 실천하려 애썼다.
어느 날, 노비 만수가 쌀 2말과 벼 4말을 중간에서 빼돌린 정황이 포착되었다. 명백한 횡령이었으나 이문건은 별다른 체벌 없이 그저 “웃고 말았다”고 기록했다. 만수의 소행을 몰라서가 아니라, 노비의 작은 농간을 일정 부분 묵인해 주는 관리법의 하나였다.
물론 매번 눈을 감아준 건 아니다. 비 방실이 “바가지를 깨뜨렸다”고 하자 이문건은 볼기 10대를 때리겠다고 했다. 겁을 먹은 방실은 사실 거짓말이었다며 멀쩡한 바가지를 다시 가져왔다. 노비의 기물 파손 보고조차 때로는 노동 기피를 위한 거짓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16세기 양반가의 풍경은 일방적인 억압과 굴종의 장소가 아니었다. 그것은 상전의 눈을 속여 조금이라도 이득을 취하려는 노비와, 그 속내를 빤히 알면서도 가내 질서와 노동력 유지를 위해 때로는 엄하게, 때로는 너그럽게 속아주는 상전 사이의 줄다리기였다. 이 역동적인 타협과 공생은 가혹한 신분제 사회 속에서 노비와 주인 모두가 삶을 지속하기 위해 선택한 지혜로운 생존전략이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역사의 진실은 낙인찍힌 노비의 비명뿐만 아니라, 그들이 일상의 틈새에서 부단히 시도했던 이 영리한 협상의 흔적들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한국국학진흥원 전통생활사총서 32)
이혜정 규장각한국학연구원 객원연구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