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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보이지 않는 시민이 도시의 기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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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파리를 설계한 오스만 남작은 넓은 대로와 기념비적 건축물로 도시의 위상을 세웠다. 랜드마크와 스카이라인은 여전히 도시의 첫인상을 만든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 도시를 다시 찾게 만드는 것은 다른 곳에 있다. 낯선 거리에서 헤매지 않도록 돕는 안내판 하나, 휠체어를 탄 시민이 망설임 없이 건널 수 있는 교차로 하나. 거대한 구조물이 도시의 얼굴을 만든다면, 이런 세밀한 배려는 도시의 품성을 만든다.

환경심리학에서는 잘 설계된 공간이 뇌의 인지 부담을 줄이고 스트레스를 낮춘다고 말한다. 출퇴근길의 보행 환경, 역사 안에서 느끼는 정보의 명료함, 밤길에서 체감하는 안심의 정도 등 도시디자인은 단순한 미적 행위가 아니라 시민의 심리적 안녕과 직결되는 보이지 않는 복지다. 그런데 그 복지의 혜택에서 가장 먼저 배제되는 사람은 누구인가. 색을 구별하기 어려운 시민, 안내 문자를 읽기 힘든 고령자, 경사로 없이는 이동할 수 없는 장애인. 도시가 이들의 불편을 얼마나 세심하게 읽어냈는가가 곧 그 도시의 진짜 기준이다.

 

권은선 이천시 총괄공공디자이너, 한국예술종합학교·인하대학교 겸임교수
권은선 이천시 총괄공공디자이너, 한국예술종합학교·인하대학교 겸임교수

스웨덴 북부 도시 우메오시는 “왜 도시계획은 늘 남성의 시선으로만 이루어졌는가”라는 질문을 공식적으로 던졌다. 어두운 버스 정류장, 시야가 막힌 지하보도, 보행자보다 자동차를 우선하던 교차로가 재설계되었다. 특정 집단을 위한 별도의 편의시설이 아니라 도시의 기본 설계 원칙 자체를 바꾼 결과, 모든 시민이 더 안전한 도시를 경험하게 되었다. 이는 ‘경사로 효과’의 원리와 같다. 휠체어 이용자를 위해 낮춘 연석이 유모차와 자전거, 캐리어를 끄는 여행자 모두에게 편의가 되듯, 보이지 않던 시민을 위한 배려는 결국 모두의 일상을 바꾼다.

이러한 전환의 흐름은 서울에서도 뚜렷하다. 지하철 노선도 전면 개편은 23개 노선, 624개 역이 얽힌 복잡한 도시 정보를 국제 표준 체계로 재구성한 정보디자인의 혁신이었다. 특히 역마다 고유 번호를 부각시킨 새 노선도는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 관광객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안전디자인에서는 적록색약자를 고려한 색채 체계를 도입했고, 연기로 가득 찬 터널의 위급 상황을 고려해 녹색과 노란색을 혼합한 ‘안전빛색’을 개발함으로써 연기 속에서도 대피로의 시인성을 확보했다. 이러한 디자인들은 국제 공모전을 통해 세계적 수준의 성과로 평가받고 있다.

가장 주목할 것은 가로가판대 디자인 개선이다. 도시 경관만이 아니라 그 안에서 일하는 운영자의 작업 환경과 인권까지 설계의 범위에 포함시켰다. 좁은 가판대 안에서 하루를 보내는 사람의 존엄을 도시가 기억한 것이다. 나아가 공공디자인위원회를 통해 유니버설디자인과 사회문제해결디자인을 체계적으로 심의하는 제도적 장치는, 이러한 배려가 일회성 사업이 아니라 도시 행정의 체계로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진정한 공공디자인은 서로 다른 조건과 감각을 가진 시민이 하나의 도시를 함께 경험할 수 있도록 세심하게 설계하는 일이다. 배려의 디자인은 비용이 아니라 도시의 미래 가치에 대한 투자다. 가장 불편한 시민,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시민이 존중받고 있는가. 그 대답이 곧 서울의 기준이고, 우리 도시의 미래다.

 

권은선 이천시 총괄공공디자이너, 한국예술종합학교·인하대학교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