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을 앞두고 연구실을 비워달라는 통보를 받으면서, 그 공간이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머문 자리였음을 실감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지위와 권력, 명예 역시 결국은 내 것이 아니라 잠시 맡겨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8년간의 교수 생활을 마무리하고 최근 정년 퇴임한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이상원 명예교수는 지난 24일 서울대 연구실에서 세계일보와 만나 이같이 소회를 밝혔다.
이 교수는 2008년 18년간의 법관 생활을 마친 뒤 학계로 자리를 옮겨 실무와 이론을 두루 아우르는 형사법 전문가로 활동해왔다. 한국경찰법학회장과 한국형사소송법학회장 등을 지냈으며, 대법원 양형위원장을 맡아 양형기준 개선에도 참여했다.
요즘 그의 관심사는 법학과 과학의 만남이다. 이 교수는 2016년 과학법 연구회를 설립해 활동해오고 있다. 지난 3일 연구회 세미나에는 법원·검찰·변호사·학계 등 100여명이 참석해 인공지능(AI)시대 법제도와 기술을 주제로 머리를 맞대기도 했다.
이 교수는 “법학은 과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동시에 과학도 법의 통제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과학을 ‘눈가리개를 한 채 전력 질주하는 말’에 비유하며 “그 방향이 낭떠러지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은 법과 같은 규범 영역의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형사법 전문가인 그는 검경 수사권 조정과 ‘검수완박’(검찰 수사권 완전 박탈), 검찰 폐지 등 문재인정부 때부터 이어진 일련의 검찰개혁에 대해 우려를 나타냈다. 검찰 권력 약화라는 정치적 목표는 일정 부분 달성됐지만, 국민을 위한 형사사법 이념 측면에서는 부정적 영향이 더 크다는 지적이다.
그는 “아무리 잘게 나뉜 수사권력이라도 국민 입장에서는 여전히 강력한 권력으로 작용한다”며 “권력을 나누면 국민의 인권이 보호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권력자의 권력이 확보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이 교수는 “검찰이 문제가 된 것은 특수수사 영역인데, 일반 형사 사건 구조를 완전히 바꾸는 방식으로 대응했다”며 “이는 오른팔이 썩어가는 환자를 두고 의사가 목을 잘라버린 격”이라고 비유했다.
특히 최근 국회에서 진행 중인 ‘윤석열 정권 정치검찰 조작기소 의혹 사건 진상규명 국정조사특별위원회’ 등 정치권의 행태를 ‘위장 권위주의(stealth authoritarianism)’로 규정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이른바 스텔스 권위주의는 선거와 법 절차 등 민주주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제도를 이용해 권력을 공고히 하고 반대 세력을 제약하는 통치 방식을 의미한다.
이 교수는 “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의견을 조율하고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인데, 최근에는 다수 의결이니 타당하다는 이유로 정치권력이 모든 것을 지배하고 있다”라며 “이러한 모습이 바로 위장 권위주의의 특징”이라고 말했다. 이어 “어떤 사건이 잘못됐는지, 누가 유죄인지 무죄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정치가 아니라 사법의 영역”이라며 “입법부는 법을 만드는 기관이지 개별 사건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주체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철거하듯 기존 제도를 무너뜨리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방식 그대로 제도 설계까지 이어지다 보니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다”며 “개혁은 사법 시스템 안에서 해결될 수 있도록 설계돼야 하며, 정치권력이 모든 문제를 직접 해결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인생 3막을 맞이한 그는 주희의 시구를 인용하며 “‘소년은 늙기 쉽고 학문은 이루기 어렵다’는 말이 요즘 더 와 닿는다”라며 “그동안 공부를 충분히 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형사법을 비롯해 과학과 법의 접점에 대한 연구를 이어갈 계획”이라며 “개인적으로는 이웃을 돕는 삶을 살고 싶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결국 우리가 가진 것은 모두 잠시 맡겨진 것일 뿐”이라며 “이제는 그것을 어떻게 쓰고 나눌 것인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