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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치매노인 지키고 불법 살피고… ‘골목 히어로’ 라이더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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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달기사들 ‘리라이더스’ 활약
서울 도봉2파출소와 업무협약
범죄 예방 등 47일간 32건 신고
소년·소녀가장에 식료품 배달도
‘도로의 무법자’ 선입견 깨트려

지난달 24일 오전 서울 강북구, 한 할머니가 기저귀를 손에 들고 맨발로 도로를 헤매고 있었다. 마침 근처에서 배달 일을 하던 조현우(37)씨는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오토바이를 돌렸다. 조씨는 “할머니께 ‘어디 불편하시냐’, ‘어디 찾으시냐’고 물었는데 횡설수설하시는 걸 보고 치매 환자인 걸 직감했다”고 전했다. 경찰에 즉시 신고한 그는 할머니가 가족의 품에 무사히 돌아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서울 도봉경찰서 도봉2파출소와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라이더유니온지부 서울지회 서울북부분회 관계자들이 지난달 12일 업무협약(MOU)을 맺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도봉서 제공
서울 도봉경찰서 도봉2파출소와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라이더유니온지부 서울지회 서울북부분회 관계자들이 지난달 12일 업무협약(MOU)을 맺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도봉서 제공

다른 배달 노동자인 고영석(46)씨는 16일 오후 8시쯤 배달하던 중 강북구 수유동 수유역 앞에서 의식 없이 쓰러져 있는 주취자를 발견했다. 6차선 도로 위에 사람이 누워 있는 위험천만한 상황이었다. 고씨는 비상등을 켠 오토바이를 ‘방패막이’ 삼아 차량을 통제했다. 주변 시민들 도움을 받아 주취자를 인도까지 옮긴 후 소방서와 경찰에 신고했다. 도착한 구급대원과 경찰에 해당 주취자가 얼마나 쓰러져 있었는지 설명한 후 다음 배달지로 향했다. 그는 “음식값을 물어줘야 했지만 한 사람의 안전이 더 소중하다”고 말했다.

 

이들은 배달을 하며 위험에 처한 사람을 발견하면 도움을 주는 ‘리(RE)라이더스’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라이더유니온지부 서울지회 서울북부분회(분회)에 속한 라이더(배달기사) 10명은 지난달 12일부터 서울 도봉구 도봉경찰서 도봉2파출소와 업무협약(MOU)을 맺고 2년간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라이더가 ‘도로의 무법자’가 아닌 서울의 한 시민으로서 떳떳이 일할 수 있도록 인식을 개선하고 싶다”는 바람에서 각종 사회활동을 시작했다. ‘리라이더스’란 이름은 서울경찰청이 추진 중인 ‘기본질서 리(RE)디자인’ 사업에서 따온 것이다.

 

이들이 도봉2파출소와 인연을 맺게 된 계기도 봉사활동이었다.

 

라이더유니온은 서울 강북구·도봉구·노원구에서 독거노인이나 생활보호대상자, 차상위 소년·소녀 가장에게 반찬이나 식료품을 배달해주는 활동을 하고 있다. 도봉2파출소 측이 이들의 활동 모습을 보고 업무협약을 제안했다. 마침 화재 훈련이나 응급처치 교육을 받은 ‘라이더 방범대’를 만들 계획이었던 분회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지난달 12일부터 이달 27일까지 47일간 이들은 총 32건의 신고 실적을 냈다.

 

치매 할머니 보호조치 1건, 범죄의심 차량 신고 1건, 교통법규위반 신고 22건, 도로파손(포트홀, 중앙분리대 등) 신고 7건, 주취자 보호조치 1건이다. 라이더에 대한 인식 개선과 안전을 위해 중앙선 침범 등 12대 중과실에 해당하는 라이더의 불법주행 신고에도 앞장섰다.

 

리라이더스 소속 라이더들은 기초적인 심폐소생술을 배웠다. 고씨는 응급처치 교육까지 이수했다.

 

골목골목을 누비는 직업적 특성을 가진 라이더들이 ‘치안의 공백’을 메울 수 있다는 게 고씨 생각이다. 실제 2024년 전기차 화재를 최초로 발견한 라이더가 주민들을 대피시켜 표창을 받은 사례도 있다. 쌓여 있는 우편물을 라이더가 발견하고 구청에 신고해 생활보호대상자가 발견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고씨는 “도봉구에서 리라이더스가 작게 시작했지만 서울시 차원으로 활동을 늘려가고 싶다”며 “궁극적으로는 방범기동대와 의용소방대를 꾸릴 계획”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경찰도 라이더의 신고가 인명피해 예방에 큰 도움이 된다고 보고 있다.

 

채중석 도봉2파출소장은 “포트홀이나 치매 환자, 주취자에 대한 신속한 신고는 생명을 구하는 일”이라며 “24시간 배달을 하는 라이더들이 현장을 빨리 발견하고 신속하게 신고하면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