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건, 뭐지. 골목길 가게에서 오래된 엽서를 팔고 있었다. 최소 수십 년에서 많게는 몇백 년 전의 엽서들. 영어는 물론 독일어나 러시아어 등 다양한 언어로 쓰인 데다가 필기체로 쓰여 있어 내용 해석도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가게 안에는 많은 사람이 마치 골동품처럼 엽서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고, 일부는 돈을 주고 사기도 했다. 아니, 왜 저런 것을 사는 것일까.
몇 해 전, 문학행사에 초청을 받아 오스트리아를 찾은 소설가 김혜진은 행사 기간 조금 남는 시간에 어느 골목을 걷다가 빈티지 엽서를 만나게 됐다. 엽서를 구입하진 않았지만, 그는 오래된 엽서를 팔거나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때 봤던 빈티지 엽서들과, 엽서를 사고파는 사람들의 잔상이 가끔 떠올랐다. 엽서에는 무슨 내용이 쓰여 있을까. 엽서의 주인이 직접 판 것인가, 아니면 끝까지 간직했다가 그 자식들이 판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버린 것일까, 그래서 누군가 주워서 여기에 판 것일까. 가끔 상상으로 번지기도 했다.
어느 순간, 자주 다니던 집 근처 헬스장의 경험과 사람들의 모습이 겹쳐지기 시작했다. 어느 날 다니던 헬스장에서 회원들이 상자 속에 명함을 넣어놓으면 나중에 추첨을 통해 단백질 셰이크 등을 주는 이벤트가 열렸다. 투명 상자 속의 명함을 보니 사람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사람, 경찰 간부, IT 회사에 다니는 직원…. 유니폼 너머 사람들의 훨씬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빈티지 잔상과 헬스장의 경험이 겹쳐지면서 마침내 단편소설 ‘빈티지 엽서’가 나왔다.
“긴 세월의 흔적이 남은 이국의 엽서, 누군가의 성격과 습관이 스며든 필체, 지금은 세상을 떠났을 게 틀림없는 수신자와 발신자, 그들 사이에 오고 간 애틋하고 다정한 언어, 그리고 그 언어 아래 흐르는 뜨거운 마음. 그녀 내면의 뭔가를 깨운 건 일상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그런 낭만적이고 감상적인 상상력인지도 몰랐다. 그 엽서들의 주인, 남자의 존재가 아니라.”
소설은 남편과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며 무미건조하게 살아가는 ‘나’가 헬스장에서 파란 반바지를 입은 남자를 만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남자의 부탁으로 그가 수집한 외국의 빈티지 엽서를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나’의 일상은 조금씩 빛을 되찾아 가지만, 어느 순간 사람들로부터 남자와의 관계에 의심을 받기 시작하면서 균열이 생긴다.
개인과 사회의 경계에서 관계의 균열을 담담하게 응시해 온 작가 김혜진이 김승옥문학상과 이효석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인 ‘빈티지 엽서’를 비롯해 최근 발표한 단편 7편을 엮은 소설집 ‘달걀의 온기’(창비)를 들고 돌아왔다.
김 작가는 이번 소설집에서 “관심은 병으로 취급받고 손해는 죄가 되는 세상에서”도 “결국 손 내미는 사람들”의 “과묵한 선의”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단절된 개인들이 예상치 못한 순간에 서로의 삶에 개입하며 만들어내는 미세한 파동을 통해 닫혀 있던 내면이 조금씩 열리고 그 틈으로 온기가 스며드는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한다.
젊은 작가 김혜진은 왜 관계의 파동과, 그 파동 속에 스미는 온기의 순간을 그리려 한 것일까. 그가 그리고 있는 관계의 파동과 온기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작가적 여로는 어디로 향해 가는 것일까. 김 작가를 지난 15일 서울 용산 세계일보 사옥에서 만났다.
―‘빈티지 엽서’ 속의 ‘나’와 파란 반바지 남자와의 관계는 어떤 관계인가요. 어떤 ‘환기’의 관계 같기도 한데요.
“사람들에겐 이루지 못한 꿈이 있잖아요. 꿈이라고 해서 거창한 무엇이라기보다는 ‘그때 그랬으면 어땠을까’ ‘다른 선택을 하면 어땠을까’, 하고 살아보지 못한 삶을 상상하는 거죠. 파란 반바지 남자는 여자에게 그런 살아보지 못한 삶을 경험하게 해주는 존재가 아닐까 생각해요. 그녀는 남편과 자전거 대리점을 운영하며 살고 있지만 번역가나 통역가를 꿈꾸었던 사람이거든요. 남자와 외국의 빈티지 엽서를 읽는 시간이 현재와는 다른 삶을 그녀에게 잠깐씩 선사한다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지금 같은 삶을 살게 된 건 사소한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말에는 자신이 선택하지 못했던 삶에 대한 아쉬움이 담겨 있는 거죠.”
김유정문학상 수상작 ‘푸른색 루비콘’은 자식의 죽음을 함께 슬퍼할 데를 찾지 못해 말에게 겨우 하소연하는 한 마부의 고독을 그린 안톤 체호프의 단편 ‘마부’가 연상되는 작품. 화자 경수는 퇴직하고 아내와 사별한 뒤 다니기 시작한 교회에서 추레한 행색의 한 남자를 만나고, 그의 부탁으로 허름한 양봉장에 차를 몰고 가게 된다. 경수는 새로운 관계에 대한 회의가 적지 않지만, 그가 내어준 꿀물 한잔에 뜻 모를 평화를 느끼게 된다.
―‘푸른색 루비콘’은 퇴직하고 상처한 경수의 스산한 삶과, 그 스산함에서 조금씩 빠져나오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경수는 홀로 남겨집니다. 그는 평생 사회생활을 했지만 관계를 맺는 데는 서툴러요. 유일하게 가까워진 사람이 박훈식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경수가 친해지리라고 상상하지 않았던 부류의 사람이죠. 하지만 혼자 힘으로 처음 관계를 맺은 사람임은 분명해요. 마지막 장면에서 경수가 그의 이름을 말하는 건, 그가 박훈식이라는 사람과 가까워졌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가 그 관계를 의미 있게 여기고 있음을 드러낸다고 생각했어요.”
표제작 ‘달걀의 온기’는 투자사기를 당한 뒤 아버지가 살던 고향 집을 처분하러 내려온 선희가 마을에서 어린 여자아이 민지를 자주 마주치면서 시작된다. 선희는 계속 눈에 밟히는 민지가 자신과 닮아 있다는 것을 문득 깨닫고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민지를 지켜보다가 스스로를 돌보는 데까지 이어지는데.
―‘달걀의 온기’는 선희가 어린 민지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마주하고 극복으로 나아가는 장면을 예민하게 포착한 작품인데요.
“외국 여행을 가면 예상치 못한 사람들의 친절과 선의에 기대야 할 때가 많잖아요. 사는 일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요즘은 자주 해요. 알든 모르든 모두가 다른 누군가의 도움과 보살핌 안에서 하루하루를 무사히 지나는 게 아닐까 하고요.”
1983년 대구에서 나고 자란 김혜진은 2012년 단편소설 ‘치킨 런’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장편소설 ‘중앙역’, ‘딸에 대하여’, ‘9번의 일’, ‘경청’, ‘오직 그녀의 것’ 등을, 중편소설 ‘불편과 나의 자서전’과 소설집 ‘어비’, ‘너라는 생활’, ‘축복을 비는 마음’ 등을 발표했다. 중앙장편문학상과 신동엽문학상, 대산문학상, 젊은작가상, 김유정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늦은 취침에 따라 조금 늦게 눈을 뜨는 그는 식사와 집안일을 한 뒤 정오 무렵부터 일을 시작한다. 주로 글을 쓰거나 행정적 일을 하고 오후 6시 무렵 끝낸다. 물론 마감이 임박한 경우엔 좀 더 글을 쓰지만. 운동을 다녀온 뒤 저녁에는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읽고 쓰는 일 말고 다른 종류의 취미를 가져보고 싶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다.
김혜진의 소설은 대체로 삶 속에서 움터온다. 생활에서 만난 경험이나 사건, 사람들이 다채로운 모습으로 소설 안으로 들어오고, 때론 다큐멘터리나 인터뷰 집에서 만난 상황이나 인물이 들어오기도 한다. 그는 늘 쓰려고 하는 모드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후회와 안도, 원망과 고마움 사이에서 흔들리며 또다시 무난한 일상 속에 안주하려는 ‘빈티지 엽서’의 ‘나’도 만날 것이다. 담담하게, 담백하게.
“남편은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 순간, 그녀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렇게 사는 건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늘 더 용기를 냈기 때문이라고. 익숙한 일상을 지키는 건 그것을 포기하는 것보다 언제나 더 어려운 일이었다고. 그녀는 그것이 자기변명과 자기합리화에 불과하다는 사실 또한 모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후회와 원망, 안도와 고마움의 감정을 동시에 느꼈던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닌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