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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레시아 전투에서 와인 경매까지… 부르고뉴 역사·문화 기행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부르고뉴는 ‘프랑스 와인의 심장’

500년 빈자 치료 오스피스 드 본

매년 11월 자선 경매·와인 축제 

본 인근 마을 알레시아 언덕 오르면

2천년전 알레시아 전투 생생

 

알리즈 생 렌 마을 베르킨게토릭스 동상.
알리즈 생 렌 마을 베르킨게토릭스 동상.

오뚝한 코와 양 갈래로 길게 기른 콧수염. 사자의 갈기를 닮은 머리카락과 건장한 풍채. 외모에선 강인한 전사의 에너지가 뿜어져 나오지만 큰 눈으로 먼 곳을 응시하는 낯빛은 아주 어둡다. 이제 전투의 패배를 인정해야 할 때. 체념한 듯 땅에 내리꽂은 긴 칼에 기대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선 갈리아족의 수장 베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 몽 오수아 언덕에 오르자 갈리아 역사의 종말을 알린 2000여년 전 치열한 알레시아 전투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에 펼쳐진다.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소연 기자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소연 기자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소연 기자
세계일보 여행면. 편집=김소연 기자

◆‘프랑스 1호 영웅’ 알레시아

 

부르고뉴는 ‘프랑스 와인의 심장’이나 다름없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 로마네콩티가 태어난 곳이 바로 부르고뉴다. 북쪽 샤블리를 시작으로 코트 도르(황금의 언덕)로 불릴 정도로 빼어난 피노누아와 샤르도네가 생산되는 코트 드 뉘, 코트 드 본을 지나 코트 샬로네즈, 마콩까지 와인 산지는 남북으로 약 180㎞ 이어진다. 이런 부르고뉴는 와인뿐 아니라 프랑의 역사가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곳이기도 하다. 프랑스인의 조상 갈리아족의 마지막 전투부터 병들고 가난한 자를 구원하던 오스피스 드 본(Hospices de Beaune)까지 다양한 역사의 갈래가 펼쳐진다.

 

2000년전 알레시아 전투 현장인 알리즈 생 렌 마을  전경.
2000년전 알레시아 전투 현장인 알리즈 생 렌 마을  전경.

부르고뉴 와인 여행의 중심 마을 본에서 코트 도르 포도밭의 화려함을 즐기며 북쪽으로 1시간가량 차로 달리면 갈리아족의 마지막 숨결이 서린 고요한 마을 알리즈 생 렌에 닿는다. 이곳은 세계사의 유명한 사건 중 하나인 갈리아족 최후의 전투가 벌어진 현장이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좁은 도로를 따라 언덕 꼭대기에 오르자 넓은 초원을 꾸미는 알록달록한 봄꽃들이 화사한 표정으로 여행자를 반긴다. 그림엽서를 닮은 풍경과 달리 언덕에 우뚝 선 높이 7m 베르킨게토릭스 동상 얼굴에는 비장함이 잔뜩 서려 있어 그가 짊어졌던 역사의 무게가 묵직하게 가슴을 때린다.

 

베르킨게토릭스 동상.
베르킨게토릭스 동상. 

지형이 독특하다. 볼록 솟은 언덕을 포위하듯, 계곡이 원형으로 펼쳐진다. 이런 지형 덕분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현장으로 날아간 듯, 치열한 전투의 장면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알레시아 전투는 기원전 5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58년부터 시작된 로마의 야심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에 맞서, 뿔뿔이 흩어져 있던 갈리아 부족들을 하나로 묶은 인물이 바로 아르베르니족의 수장 베르킨게토릭스다. 로마군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초토화 작전’으로 카이사르를 고전에 빠뜨린 ‘갈리아의 영웅’ 베르킨게토릭스는 보병 8만명과 전략적 요충지 알레시아 언덕 요새에 집결, 갈리아족의 운명을 건 최후의 일전에 돌입한다.

 

베르킨게토릭스 동상.
베르킨게토릭스 동상.

하지만 카이사르의 천재적 공성술에 베르킨게토릭스는 그만 위기에 빠지고 만다. 카이사르가 요새 안의 갈리아군이 나오지 못하도록 막고, 외부 구원군도 차단하는 총길이 약 40km의 이중 포위망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의 작전은 굶겨 죽이기. 요새 안에 갇힌 갈리아군의 식량은 불과 30일 분량이라 하나둘 굶어 죽는 처참한 상황에 내몰린다. 전투 막바지에 약 25만명에 달하는 갈리아 구원군이 도착해 안팎에서 로마군을 공격했지만, 카이사르의 두터운 방어선과 게르만 기병대의 활약으로 전세는 완전히 기울고 만다.

 

알레시안 언덕.
알레시안 언덕.

더 이상의 저항이 무의미함을 깨달은 베르킨게토릭스는 투항을 결정, 말을 타고 카이사르의 주위를 한 바퀴 돈 뒤 무장을 해제하고 침묵 속에 무릎을 꿇었다. 포로가 된 그는 로마로 압송돼 6년 동안 지하 감옥에 수감됐고, 결국 기원전 46년 카이사르의 개선식에 끌려 나와 로마인들에게 전시된 후 처형되고 만다. 전투의 패배로 갈리아 역사는 막을 내리고 로마 문명으로 흡수 통합된다. 갈리아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벨기에, 스위스 서부, 독일 라인강 서쪽, 이탈리아 북부까지 아우르던 곳이다.

 

무제오파크 알레시아 베르킨게토릭스  얼굴 조각상.
무제오파크 알레시아 베르킨게토릭스  얼굴 조각상.

베르킨게토릭스 동상은 나폴레옹 3세가 건립했는데 자신의 젊은 시절을 본떠서 만들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나폴레옹 3세 이전까지 프랑스의 뿌리는 대개 로마나 프랑크 왕국에서 찾았지만 그는 민족의 자긍심을 높이려고 로마에 저항한 갈리아의 영웅 베르킨게토릭스를 주목한다. 이에 대대적인 고고학 발굴을 지시, 알레시아 전투 현장을 찾아냈고 조각가 에메 밀레가 1865년 동상을 제작했다. 나폴레옹 3세는 패배한 영웅이지만 끝까지 민족을 지킨 베르킨게토릭스의 이미지에 자신을 투영해 황제 역시 프랑스를 수호하는 강인한 지도자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려 했다. 기단에는 그가 직접 고른 “하나 된 갈리아는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며, 같은 정신으로 뭉친다면 온 세상을 대적할 수 있다”는 문구가 적혀 있다. 60여개 부족으로 갈라져 싸우다 로마에 패배한 과거를 반성하고, 제2제정기 프랑스의 단합을 강조하려는 황제의 강력한 의중이 담겼다.

 

무제오파크 알레시아.
무제오파크 알레시아. 

언덕 아래 들판에 보이는 독특한 건축물은 무제오파크 알레시아. 세계적인 건축가 베르나르 추미가 설계한 건물로 나무 격자로 감싼 원형 구조 건축미가 돋보인다. 당시 로마군이 건설한 포위벽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건물로, 옥상 정원에 오르면 알레시아 언덕이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또 외부에 실물 크기 포위벽을 약 100m 길이로 완벽하게 재현해 놓았다.

 

오스피스 드 본.
오스피스 드 본.
오스피스 드 본.
오스피스 드 본.

◆가난한 병자의 안식처, 오스피스 드 본

 

본 시내 중심에 있는 오스피스 드 본은 15세기 중세 시대 가난하고 병든 이들을 위해 세워진 자선병원이다. 1443년 부르고뉴 공국의 재상 니콜라 로랭과 아내 기곤 드 살랭이 설립한 이래, 약 5세기 동안 가난한 병자들을 돌봤고 지금은 중세 의학 역사와 예술품을 소장한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안으로 들어서자 기하학적 문양의 화려한 타일 지붕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노랑, 초록, 빨강, 갈색의 유약 타일이 뱀 가죽 같은 정교한 패턴을 그리며 햇빛에 반짝이는 풍경에 여행자들은 탄성을 터뜨린다.

 

빈민들의 방.
빈민들의 방.
예배당 제단화 ‘최후의 심판’.
예배당 제단화 ‘최후의 심판’.

안뜰을 지나 처음 마주하는 공간은 거대한 빈민들의 방. 높은 오크 나무 천장이 웅장함을 더하며, 붉은 커튼이 드리워진 하얀 침대들이 양옆으로 길게 늘어선 풍경이 이채롭다. 과거 환자들은 이 침대에 누워 신부가 집전하는 예배를 보며 치유의 희망을 품었다. 예배당 정중앙의 작품은 로히어르 판 데르 베이던의 다면 제단화 ‘최후의 심판’.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 선 영혼들의 모습을 극도로 정교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환자들은 제단화를 보면서 영혼의 구원도 갈망했다.

 

주방.
주방.
약국.
약국.

환자들의 영양을 책임지던 주방에는 거대한 고딕풍 벽난로와 식사 준비를 돕던 자동 회전 꼬챙이 등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약국 전시실에는 18세기에 제작된 도자기 약병 130여개가 선반을 가득 채우고 있다. 당시 사용된 신기한 조제 도구들과 약초 가루들을 통해 중세 의학의 흥미로운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오스피스 드 본 와인.
오스피스 드 본 와인.

오스피스 드 본이 소유한 광활한 포도밭과 와인 경매의 역사도 마주한다. 자선 병원은 귀족과 독지가들의 기부로 운영됐으며, 특히 부르고뉴의 독지가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비옥한 포도밭을 유산으로 남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모인 포도밭이 현재 약 60ha에 달하며 이 중 85% 이상이 그랑크뤼와 프리미에 크뤼로 이뤄진 부르고뉴 최고의 포도밭들이다. 오스피스 드 본은 직접 햇와인을 생산한 뒤 자선경매를 통해 ‘피에스’로 불리는 228ℓ 오크통째로 와이너리 등에 판매한다. 이에 자선경매 행사는 부르고뉴 와인 가격의 지표로도 활용된다. 와이너리들은 낙찰받은 와인을 직접 병입한 뒤 오스피스 드 본이 새겨진 공식 레이블에 와이너리 이름을 새겨 유통한다.

 

레 알 드 본 주말장터.
레 알 드 본 주말장터.

초기에는 비공개로 와인을 판매했지만 더 많은 수익을 투명하게 확보하기 위해 1859년 공개 경매 방식을 도입했다. 또 2005년 크리스티, 2021년 소더비 등 세계적인 경매사와 손을 잡으면서 전 세계 와인 애호가와 투자자들이 주목하는 글로벌 이벤트로 거듭났다. 경매의 하이라이트는 ‘대통령의 통’이라 불리는 최고 품질 와인이 담긴 단 하나의 오크통이다. 낙찰금은 매년 선정된 특정 자선 단체에 전액 기부되고 매년 역대 최고가를 경신해 화제가 되곤 한다. 매년 11월 셋째 주 일요일 진행되는 자선 경매는 현재 주말 시장이 열리는 레 알 드 본에서 열리며 부르고뉴의 가장 성대한 축제로 자리 잡았다. 

 

레 알 드 본 광장 주말장터.
레 알 드 본 광장 주말장터.
레 알 드 본 광장 주말장터.
레 알 드 본 광장 주말장터.

◆부르고뉴 맛·향 즐기는 토요장터

 

오스피스 드 본 밖으로 나서자 레 알 드 본 광장이 시끌벅적하다. 마침 토요일 오전이라 부르고뉴의 맛과 향이 모두 모이는 본의 주말 장터가 펼쳐졌다. 수요일에도 장터가 열리지만, 규모가 훨씬 작고 식료품 위주이며 토요일은 의류와 공예품까지 포함된 대규모 종합 시장이 들어선다. 부르고뉴의 자부심 브레스 닭, 갓 구워낸 로티세리 치킨, 에푸아스 등 부르고뉴 대표 치즈와 현지 농가에서 직접 만든 소시송, 테린 등을 맛볼 수 있다. 본에서 빼놓을 수 없는 머스터드와 진저브레드, 아니스 사탕 등도 인기다. 또 가을에는 부르고뉴산 블랙 트뤼프와 신선한 야생 버섯들이 귀한 자태를 드러낸다. 바로 옆 카르노 광장에서는 빈티지한 매력의 프랑스 골동품, 수공예 주얼리, 가죽 가방 등도 만난다. 광장의 노천카페에서 장터의 열기를 바라보며 화이트 와인 한잔을 곁들이면 낭만 가득한 추억을 남길 수 있다.

 

레 알 드 본 광장 주말장터.
레 알 드 본 광장 주말장터.
폴 데이 작품 레 자무뢰.
폴 데이 작품 레 자무뢰.

광장에 놓인 실물 두 배 크기 소 한 마리가 눈길을 끈다. 웅장한 공공 기념물을 다수 선보인 폴 데이의 청동 조각 작품 ‘르 뵈프 부르기뇽’이다. 뵈프 부르기뇽은 소고기를 레드와인에 졸여 만드는 부르고뉴의 대표 미식으로, 부르고뉴의 상징적인 소 품종 샤롤레를 모델로 만들었다. 그의 작품은 미술관과 관광안내소로 쓰이는 포르트 마리 드 부르고뉴 건물 앞에도 놓여 있다. 연인이 입을 맞추는 ‘레 자무뢰’로, 작가의 가장 유명한 공공 미술 작품인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 역의 ‘만남의 장소’ 조각상을 모티브로 만들었다.

 

최현태 기자는 국제공인와인전문가 과정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레벨3 Advanced, 프랑스와인전문가 과정 FWS(French Wine Scholar), 부르고뉴와인 마스터 프로그램, 뉴질랜드와인전문가 과정, 캘리포니아와인전문가 과정 캡스톤(Capstone) 레벨1&2를 취득한 와인전문가입니다. 2018년부터 매년 유럽에서 열리는 세계최대와인경진대회 CMB(Concours Mondial De Bruxelles) 심사위원, 2017년부터 국제와인기구(OIV) 공인 아시아 유일 와인경진대회 아시아와인트로피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소펙사 코리아 한국소믈리에대회 심사위원도 역임했습니다. 독일 ProWein, 이탈리아 Vinitaly 등 다양한 와인 엑스포를 취재하며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미국, 호주, 독일, 체코, 스위스, 조지아, 중국 등 다양한 국가의 와이너리 투어 경험을 토대로 독자에게 알찬 와인 정보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