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보기메뉴 보기 검색

[박영준 칼럼] 격변의 시대, 커지는 중견국 연대론

입력 :
폰트 크게 폰트 작게
중동發 전쟁 등 국제 질서 요동
美, 자국 이익 위해 규범 이탈
동맹 관계 변화… 新연대 절실
韓, 濠 등 중견국과 협력 필요

지난달 중순, 튀르키예 정부가 15년째 주최해 온 다자간 국제회의 ‘안탈리아 외교포럼’이 개최되었다. 이를 보도한 외신들에 따르면 유럽, 중동,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10여개국 정상을 포함한 외교관들이 참석하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미국·이란 전쟁 등의 국제 정세 현안들을 논의했다고 한다. 회의를 주관한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기조연설을 통해 최근의 글로벌 정세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 미국 및 이스라엘과 이란 전쟁에서 보이듯이 위기 상황에 처해 있음을 강조하고, 유사한 입장을 가진 국가 간의 협력 필요성을 강조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연장선상에서 튀르키예 외무장관은 회의 기간에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파키스탄의 카운터파트들과 별도 회의를 갖고, 국제 정세 불안정에 대응하기 위한 논의도 진행했다고 한다.

사실 지난 2월 말부터 중동지역에서 개시된 미국과 이스라엘의 대이란 전쟁, 그리고 2022년부터 시작되어 아직도 진행 중인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그 개전 요인이나 전쟁 수행 방식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이자, 핵확산금지조약(NPT) 체제하에서 핵무기 보유가 인정된 미국과 러시아와 같은 강대국들이 유엔 안보리의 결의 없이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엔이나 NPT 등 주요 국제기구와 규범들을 만들어 국제안보질서를 구축해온 강대국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규범을 이탈하여 상대적 약소국가들에 대해 무력 수단을 사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냉전기와 탈냉전기를 거치면서 정착된 국제질서가 지난 80여년간 경험하지 못했던 불안정과 동요에 휩싸이고 있다.

박영준 국방대학교 국가안보문제연구소장
박영준 국방대학교 국가안보문제연구소장

이에 따라 튀르키예처럼 미국과 동맹관계를 맺고 국제규범에 순응해 온 다수의 중견국가들이 상호 협력과 연대를 모색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지난 2월 개최된 ‘다보스 포럼’에서 연설을 통해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바를 차용하면서, 최근의 국제질서는 강대국들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약소국들은 주어진 운명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강대국들이 상호 간의 경쟁 과정에서 관세를 경제적 무기로 삼고, 국제기구를 이탈하는 행태를 보이는 가운데, 중견국들이 연대하여 협력하지 않으면 오히려 강대국들의 메뉴가 될 것이라고 경계한다.

전통적으로 미국과의 동맹을 외교·안보 정책의 핵심축으로 발전시켜 온 일본에서도 미묘한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외무성 사무차관을 지낸 베테랑 외교관인 오카노 마사타카 전 일본 국가안전보장국장은 지난 2월, 포린 어페어스에의 기고문을 통해 미국 트럼프 정부가 관세 기반의 무역정책을 강행하고, 동맹국들에 대한 방위비 분담 증대를 요구하고, 유엔과 같은 국제기구들에서 탈퇴하는 양상들이 미국 자신이 건설한 체계를 붕괴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고 우려한다. 이 같은 현상에 직면하여 그는 일본으로서도 전략적 자율성의 외교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한국, 아세안 국가들, 호주, 인도, 캐나다 등과의 협력 심화 필요를 제기하고 있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중시해 온 국가들에서 새롭게 중견국 연대를 모색하려는 국제사회의 움직임은 유사한 입장에 처한 한국에도 유의해야 할 외교 과제를 제기하고 있다. 다만 한국으로서는 관세 인상이나 대미 투자 압박 등 트럼프 행정부가 취하는 대외정책이 그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것이라 할지라도 미국과의 전통적인 동맹관계를 결코 경시할 수 없다. 트럼프 행정부가 지난해 말 이후 공표된 국가안보전략서나 국가방위전략서 등에서 표명했듯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의 안정된 세력균형과 북핵 위협 억제의 목표를 공유하면서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을 지원하는 동맹 차원에서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동시에 그간 구축해 온 중견국 네트워크들, 예컨대 믹타(MIKTA) 회원국들이나 유엔사 회원국들과의 협력관계를 재정비할 필요가 있다. 지정학적 질서의 격변과 불안정성에 대응하기 위해 동맹의 심화와 중견국 연대의 쇄신을 동시에 추진하는 한국형 외교·안보 전략이 필요하다.

 

박영준 국방대학교 국가안보문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