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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촌’으로 백성 신뢰 얻은 조선의 과세 [조선생활실록(實LOG) 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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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 농경지 조사·측량하는 量田
세금 징수와 직결...官·民 분쟁거리
양전사 임명으로 객관적 측량 도모
측량 도구인 ‘양승’ 논란 휘말리면
새 공인 도구 내려 보내 다시 제작
측량 끝난 곳마저도 수치 바로잡아
‘1촌’으로 백성들 납득과 동의 구해
오늘날 조세 제도도 공정성이 생명

‘근래에 양전하는 일 때문에 날마다 시끄럽고 소란스럽다. 사람들이 모두 거기에 골몰했고, 나이가 어린 학동들 또한 여가가 없었다.’ (김령의 <계암일록> 1934년 11월 24월)

 

1900년 간행한 충청남도 아산군의 양안으로, 아산군 11개 면의 다양한 토지의 모양을 규정에 따라 실제와 최대한 가깝게 기재하고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900년 간행한 충청남도 아산군의 양안으로, 아산군 11개 면의 다양한 토지의 모양을 규정에 따라 실제와 최대한 가깝게 기재하고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1634년 겨울 경상도 예안(현 안동시 와룡면)은 조정에서 실시하는 양전(토지 측량)으로 소란했다. 이해 9월 양전이 시작되자 마을은 실무자 접대 등으로 분주했다. 양전의 결과에 따라 세금이 달라졌다. 관과 민 모두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없었다. 양전의 주기는 20년이었는데, 1634년 양전은 30년 만에 실시되는 것이었다. 한 세대가 부담할 세금이 결정되는 일이었으니 조정과 마을 그리고 개인까지 양전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시대 양전을 관장하는 관원을 ‘양전사’라고 일컬었다. 양전사는 양전 시에 임명하는 임시직으로, 지방의 수령이 담당했다. 양전사의 파견은 관과 마을 유지 사이 유착을 막고 객관적 측량을 염두에 둔 조치였다.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김령(1577~1641년)이 살던 예안은 애초에 비안 수령이 양전사로 예정되었으나, 변동이 생겨 예천 수령 홍진문이 맡았다. 홍진문은 혹독하게 양전을 실시했다. 김령은 홍진문과 예안 수령 사이 불화를 연유로 꼽았다.

 

공식 토지대장인 양안의 간행을 위해 작성한 양전 조사 문건. 양전 조사는 중대한 사안이었던 만큼 양안의 간행 전까지 지속적인 수정과 보완이 이뤄졌다. 소수박물관 소장
공식 토지대장인 양안의 간행을 위해 작성한 양전 조사 문건. 양전 조사는 중대한 사안이었던 만큼 양안의 간행 전까지 지속적인 수정과 보완이 이뤄졌다. 소수박물관 소장

‘세금’이 걸린 문제였으므로, 아전과 마을 주민은 양전사를 잘 접대했다. 이 과정에서 양전사의 탐욕이 불거지기도 했다. 김령은 <계암일록>에서 양전사 신득연이 관기 끗생에게 미혹되어 양전을 제대로 관리하지 않았고 아전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렸다며 비판했다. 물론, 개인의 기록이라 정말 그러했는지 확언할 수 없겠다. 하지만 신득연과 관기 끗생이 쌍륙 놀이하며 즐겼고, 그녀를 양민으로 만들어 데려가려고까지 했다는 기록은 퍽 상세하다. 양전사의 일거수일투족이 초미의 관심사였던 상황에서, 신득연의 처신은 예안 백성에게 깊은 불신을 심어주었다.

 

그럼에도 양전사는 객관적 조사를 진행하는 데 꼭 필요했다. 김령은 신득연과 달리, 충청좌도와 우도에 임명된 이현은 공평하고 관대했다고 적었다. 충청도를 담당했던 이현은 토지 등급을 부당하게 높여 백성에게 고통을 준 수령들을 엄중히 처벌했다. 또 김령은 경상우를 담당했던 임광을 두고는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끝내는 고치고 바꾸었다고 적었다. 양전의 성패는 결국 측량 도구의 정밀함 이전에,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의 공정함에 달렸던 셈이었다.

 

조선시대 문신 계암 김령이 1603년 7월에서 1641년 3월까지 쓴 일기 &amp;lt;계암일록&amp;gt;. 선비의 일상을 자세히 기록, 생활사 연구에 주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조선시대 문신 계암 김령이 1603년 7월에서 1641년 3월까지 쓴 일기 <계암일록>. 선비의 일상을 자세히 기록, 생활사 연구에 주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오늘날의 논밭은 대개 규격화된 사각형이지만, 조선시대는 제각각이었다. 이를 파악하기 위해 삼각형, 사다리꼴 등 다양한 유형을 마련해 토지대장인 ‘양안’을 만들었다. 대한제국기에 이르러서는 원형과 초승달 모양까지 추가해 열 가지 유형으로 세분했다. 이렇게 마련된 열 가지 유형에 들지 않는 논밭은 변의 개수에 따라 다변형으로 이름을 정해서 기재했다. 어떻게든 실제 땅의 모양을 정확히 기록해 조세의 타당한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던 노력의 산물이다.

 

또 비옥한 정도에 따라 토지의 등급을 구분했다. 같은 면적이라도, 토지 등급에 따라 세율이 달랐다.

 

11종의 부동산 서류의 주요 정보를 1종의 서류에 종합한 ‘부동산 종합증명서’로, 2012년 3월부터 발급을 시작하였다. 2012년 3월 5일 국토해양부 보도자료
11종의 부동산 서류의 주요 정보를 1종의 서류에 종합한 ‘부동산 종합증명서’로, 2012년 3월부터 발급을 시작하였다. 2012년 3월 5일 국토해양부 보도자료

측량에서 사용할 양승(量繩: 줄)의 제작도 중요한 사안이었다. 조정은 낙인을 찍은 ‘양척(量尺: 공인 자)’을 지방에 보냈고 습도에 따라 길이가 변하지 않도록 대나무나 싸리나무 껍질로 양승을 제작하도록 했다. 삼이나 풀로 만든 새끼줄은 이슬이나 물기에 젖어 길이가 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습기를 머금었다가 마르며 길이가 줄면 나라에서 거두는 세금은 늘겠지만 그만큼 백성의 삶이 피폐할 수밖에 없었다.

 

양승의 기준이 되는 양척을 다시 제작해 보내는 일도 있었다. 김령은 1634년 10월 7일자 일기에서 양척이 다시 내려온 일을 적었다. 처음 보낸 자가 짧아 토지 면적이 실제보다 넓게 측정된다는 민원을 수용한 결과였다. 새 ‘양척’은 이전에 비해 1촌 남짓 길었다. 당연히 양승도 새롭게 제작했고, 측량을 마쳤던 곳도 예외 없이 새로 측량했다. 백성의 신뢰와 이에 따른 성실한 납세가 없다면 양전은 무의미했다. 당시 조정은 뒤늦게나마 양척을 바로잡고 이로써 신뢰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인 1912년 수정 및 보완된 청주군의 지적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일제강점기인 1912년 수정 및 보완된 청주군의 지적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세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와 국민이 서로를 얼마나 신뢰하는지 보여주는 가장 투명한 지표다. 400년 전 예안의 논밭을 달궜던 소란은 오늘날 복잡한 세무 행정 앞에 선 현대인의 분주함과 맞닿아 있다. 또 이미 끝난 측량까지 뒤엎으며 ‘1촌’의 길이를 바로잡았던 조정의 결단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조세 공정은 단순한 수치 계산의 문제를 넘어, 납세자의 납득과 동의를 구하는 정치적 행위이기 때문이다. 400년 전 그 ‘1촌’이 신뢰를 회복했듯, 오늘날의 조세 제도 역시 ‘공정함’이라는 토대 위에서만 비로소 그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 (한국국학진흥원 전통생활사총서 27)

 

홍현성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