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보드 소리가 가득한 사무실. 파티션 너머에서 기획안을 다듬던 김 대리의 화면엔 깜박이는 커서 대신 알록달록한 로고 아래 커다랗게 입을 연 하얀 상자가 가득하다. “첨부 데이터를 참고해 실적을 요약하고, 전략 방향을 제안해 줘.” 몇 번을 썼다 지웠어야 했을 문장들이 단 몇 초 만에 생성되고, 복잡한 수식과 씨름해야 정리됐을 숫자들이 화면 너머에서 마법처럼 나타났다. 김 대리는 상자가 뱉은 글을 읽고, 복사하고, 붙여넣었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놓치고 있다는 사소한 불편함은 이미 화면 너머로 사라지고 난 뒤였다. 완결된 문장이 김 대리의 것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김 대리의 업무 루틴이 신세대의 나태처럼 보인다면, 유감스럽게도 당신은 이미 인공지능(AI) 업무 시대에서 도태된 것이다. 회사와 정부가 입을 모아 주장하듯, 업무적 AI 활용은 게으름이 아닌 합리성의 문제다. 더 빠르고, 더 매끄럽고, 더 그럴듯한 것이 눈앞에 있을 때 그것을 쓰지 않는 것이 오히려 패착이라는 것은 유구한 역사가 증명하는 바다. 의존은 결함의 원인이 아닌 최적화의 결과다. 그러니 AI 활용을 둘러싼 잡음도 신기술 적응기에 따라오는 소음일 뿐이라는 것이다. 생산성 수치가 오르고 처리 속도가 빨라질 수만 있다면 그 과정에서 무엇이 소거되는지는 잠시 뒤편으로 밀린다. 그러나 기존 신기술로 인한 노동력 대체와 대규모언어모델(LLM) AI의 근본적인 차이를 고려한다면, 그 주장은 완전한 거짓이라 하기도 어렵지만 본질적인 진실이라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뇌는 원래부터 환경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작동하는 분산 시스템이다. 생소한 이름을 메모장에 적어 상기하고, 지저분한 숫자를 계산기에 위임하고, 복잡한 길 찾기를 위치확인시스템(GPS)에 의존하듯, 우리는 외부 도구에 사고의 일부를 위탁하는 인지적 오프로딩을 본능적으로 선택해 왔다. 하지만 LLM AI가 제공하는 위탁은 단순한 연산을 넘어 언어를 통한 의미 창출에까지 닿는다. 메모장에 받아쓴 이름을 나중에 직접 찾아보는 것과, AI가 건넨 문장을 그대로 제출하는 것 사이의 거리는 보기보다 훨씬 멀다. 기계가 제안한 것을 사람의 판단보다 신뢰하게 되는 자동화 편향이 일상에 스며들기 시작한 것이다.
인쇄기가 필사를 밀어내고, 계산기가 암산을 구식으로 만들었듯, 기술의 발전은 항상 특정 노동을 잉여로 만들면서 전진해 왔다. AI와 노동의 담론이 적응의 문제라는 프레임으로 수렴하는 것도 그래서 익숙한 접근이다. 그러나 LLM AI가 퇴장시키는 것은 다운그레이드된 기술 형태의 노동이 아니다. 인간이 자신을 구성해 온 행위 그 자체, 판단과 표현이라는 고유한 사고력이다. 이전의 기계들이 손과 발을 빌렸다면, LLM AI는 목소리와 시선, 판단까지 빌린다. AI는 주체가 스스로를 인식하는 방식 자체를 구성하는 장치(apparatus)가 되어 가고 있다. 도구의 변화를 넘어, 도구와 사용자 사이의 위계가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그 전도가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곳은 아이러니하게도 개성을 가장 강렬하게 추구하는 이들이다. 알고리즘이 설계한 마이크로트렌드를 소비하면서 자신만의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믿는 사람들, AI에게 감정 상담을 구하는 이용자들, 심지어 저녁 메뉴조차 상의하는 이들. 깜박이는 커서가 도출할 문장을 기다리는 그들에게 AI가 돌려주는 답은 공감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것은 반향이다. AI는 사용자의 언어 패턴을 학습해 그것을 더 매끄럽게 되돌려준다.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세련되게 포장한 메아리를 친구의 따뜻한 속삭임으로 착각한다. 공감으로 포장된 경험은 착각이 오류라는 것을 알아차릴 기회 자체를 소거한다. 이렇듯 주체는 자신의 언어를 돌려받으며 점점 더 확신에 차고, 그 확신의 진원지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은 점점 더 흐려진다.
물리적 현실과 단절된 디지털 공간이 체화된 디지털 시대의 우리에겐 이 모조품의 효과는 작지 않다. 문장 너머에 몸 없는 기계가 있다는 것을 인지하더라도, 그 교류에서 오는 감정적 위로는 충분히 진정성 있다고 판단되는 것이다. 어차피 글자로 소통하는 건 사람이나 기계나 마찬가지인데, 가장 중요한 건 당사자가 어떤 감정을 느끼느냐 아닐까. 이러한 전제를 바탕으로 LLM AI가 제공하는 위안의 진정성에 관한 연구는 활발히 진행되고 있지만, 그 위안을 생성하는 과정의 문제에는 의견이 크게 갈리지 않는다. 불편함을 견디고, 모순 앞에서 버티고, 그 과정에서 자기 판단을 조금씩 갱신하며 성장하는 것은 인간의 특권이자, 몇 번이고 구워지며 단단해지는 도자기처럼 필수적인 경험이다. AI는 그 경험을 우회한다. 느리고 불완전한 자기 목소리를 찾는 과정이 생략될 때,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자아가 상실된 타인의 언어다. 마찰이 사라질수록 마찰을 견디는 저항력도 소멸하고, 생각의 자리를 대신 채우는 속도가 빨라질수록 사고 자체를 묻는 습관도 소실된다. 편리함이 구조화될 때, 그것은 더 이상 개인의 선택이 아닌 시스템의 기본값이 된다. 이 회피적 우회는 이제 개인을 넘어 구조의 압력이 되어 가고 있다.
AI의 답변을 기다리던 김 대리를 다시 떠올린다. 김 대리가 외주화한 것은 보고서 작성이었을까, 아니면 생각을 모으고, 틀린 문장을 써서 지우고, 다시 시작하며 축적되는 사고력의 잠재성이었을까. 생산성이라는 이름으로 축약된 효율이 무엇을 소각하고 있는지, 우리는 아직 그 연기조차 제대로 맡지 못했다. 그 답이 무엇이든, 하얀 상자는 오늘도 깜빡이며 다음 입력을 기다리고 있다.
반휘은 칼럼니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