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29일은 매헌 윤봉길(1908∼1932) 의사의 중국 상하이 의거 94주년 기념일이었다. 1932년 4월29일 윤 의사는 상하이 홍커우(虹口) 공원에 모인 일본의 고위급 인사들을 겨냥해 폭탄을 던졌다. 일본군 수뇌부에 해당하는 장성 등 7명이 그 자리에서 폭사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중국 국민당 장제스(蔣介石) 주석이 윤 의사를 향해 “중국 100만 대군도 하지 못한 일을 한 청년이 해냈다”고 찬사를 보냈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한국 독립운동가의 기개에 감탄한 중국은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적극 지원했다.
중국은 1937년 이래 일본과 전쟁 중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전반부에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1941년 12월7일 일본군의 하와이 진주만 공습 이후에야 미국이 일본을 상대로 전쟁에 나서며 비로소 중국도 연합국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데 미국과 달리 영국·소련(현 러시아)은 중국을 과소평가했다. 2차대전 기간 미·영·소 3대 연합국 정상회의에 중국은 끼지 못했다. 장제스가 연합국 전시 외교에 직접 등판해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1943년 11월 23∼27일 이집트 카이로에서 열린 카이로 회의가 최초였다.
당시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와 만난 장제스는 전후 일본 처리 방안을 협의했다. 장제스는 “일본이 패망한 뒤 가능한 가장 빠른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3국 정상회의 후 발표된 ‘카이로 선언’은 한국 독립의 시기 및 방식과 관련해 “적절한 절차를 거쳐”(in due course)라는 애매모호한 규정을 뒀다. 인도 등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거느린 영국의 이해 관계를 감안한 처칠의 반대 때문이었다. 그래도 한국인들은 강대국들이 처음 ‘한국 독립’을 약속했다는 점에서 카이로 선언을 높이 평가한다.
중국이 이집트에 ‘카이로 선언 기념비’를 세웠다. 지난 3일 주(駐)이집트 중국 대사관에 따르면 83년 전 3국 정상회의가 열린 카이로 메나하우스 호텔에 들어선 기념비에는 “카이로 선언이 이곳에서 체결된 것을 기념한다. 대만의 중국 반환은 2차대전 승리의 성과이자 전후 국제 질서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다”라고 새겨져 있다. 카이로 회의 하면 한국인들은 한국 독립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당시 선언문에는 ‘일본이 중국에서 탈취한 만주·대만 등을 중국에 반환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오늘날 ‘하나의 중국’ 원칙의 역사적·법리적 근거를 카이로 선언에서 찾는다. 세계 어느 민족이든 자신에게 중요한 것만 기억하려는 점은 공통적인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