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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어낼 용기… 혈연은 윤리의 면죄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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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해방/에이먼 돌런/김은지 옮김/1만9000원

 

혈연은 윤리의 면죄부인가. 부모라는 이유만으로 용서해야 하는가. 에이먼 돌런의 ‘가족해방’은 한국 사회가 좀처럼 입 밖에 내지 못했던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책 주장은 단호하다. 어떤 가족은 화해의 대상이 아니라 반드시 끊어내야 할 폭력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베테랑 출판 편집자인 저자는 리처드 도킨스의 ‘만들어진 신’ 등 논쟁적 논픽션을 세상에 내놓은 인물이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브롱크스의 가난한 가정, 상습적 구타, 공공장소에서 아이를 조롱하고 망신주는 일상, 일부러 온수를 끊어버린 욕실, 형편없는 음식, 크리스마스 선물상자에 희망 대신 모욕을 넣어두던 어머니. 저자는 어린 시절 겪은 학대를 강제수용소 생존자 고통에 비유한다.

 

에이먼 돌런/김은지 옮김/1만9000원
에이먼 돌런/김은지 옮김/1만9000원

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피해의 고백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회가 ‘화해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고 본다. 가족 문제의 해답은 늘 이해와 용서, 관계 회복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그는 묻는다. 가해자가 변하지 않았는데 왜 피해자만 용서를 강요받아야 하는가.

그가 특히 날카롭게 겨누는 것은 ‘유해한 긍정성’이다. 상처를 직시하기보다 “좋게 생각하라”고 말하는 문화, 갈등을 봉합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생존자 입을 막는다는 주장이다. 그는 어린 시절 학대가 남기는 복합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가족 내부에 집중된 폭력 실상, 정신의학의 한계까지 촘촘히 끌어온다. 회고록과 심리학, 사회학이 한데 얽힌 독특한 구성이다.

인상적인 것은 절연을 파괴가 아니라 ‘경계 세우기’의 과정으로 설명하는 대목이다. 저자는 무조건 관계를 끊으라고 단순하게 말하지 않는다.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존중하지 않는 가족과 거리를 두라고 말한다. 회복 가능성이 있다면 관계는 이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끝내 변하지 않는 폭력 앞에서는 다시는 보지 않는 것 역시 건강한 선택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한국 사회 또한 가족을 신성시해 왔다. “가족이니까 참아야지”라는 말은 여전히 강력하다. 책은 그 통념에 균열을 낸다. 가족이 상처의 근원일 수 있다는 사실, 떠나는 것이 삶을 지키는 윤리일 수 있다는 사실을 저자는 역설한다. 오래 외면된 고통을 언어로 끌어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