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로 표상된 국가의 기원 – 국신(國神)의 전통
우리가 기억하는 국가의 기원은 흔히 강인한 부성(父性)의 질서와 권위로 대변되어 왔다. 그러나 우리 역사의 여명기를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그 준엄한 외연 너머에 만물을 품어 기르는 따스한 ‘어머니’의 본질이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 민족이 예부터 상정했던 국가의 개념은 국가란 단순히 정치적 통치 체제이기 이전에, 생명을 잉태하고 수호하는 지고한 여성 신성(神性), 즉 ‘국신(國神)’이라는 독자적인 뿌리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마고(麻姑) 신화(神話)가 대표적인 예이다.
신라의 충신 박제상이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부도지(符都誌)』는 우리 민족의 상고시대 우주관과 창세 신화를 집대성한 문헌이다. 한민족판 ‘창세기’라 일컬어질 만큼 장엄한 서사를 담은 이 기록은 마고를 가리켜 “마고성의 주인으로서 만물의 본음(本音)을 다스리는 존재”라 정의한다. 이는 그녀를 단순한 설화 속 인물을 넘어, 세계 질서와 조화를 관장하는 근원적 주체이자 국가적 신격으로 격상시킨 것이다.
이러한 문헌적 기록은 민간의 구전 설화 속에서 더욱 강력한 생명력을 얻는다. 한반도 전역에 뿌리내린 마고 신화는 산과 강, 섬과 같은 거대한 대지의 골격이 여성적 존재의 행위를 통해 빚어졌음을 생생히 증언한다. 이는 우리 선조들이 자신들이 발을 딛고 선 국토의 공간적 질서와 ‘여성적 신성(Divine Feminine)’의 이미지로 투영해 왔음을 보여준다. 즉, 우리 조상들에게 국가는 눈에 보이는 통치 조직이기 이전에, 대지라는 어머니의 품 안에서 탄생한 신성한 질서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이와 같은 상징 구조는 국가의 기틀을 세우는 건국 서사에서도 반복된다. 웅녀(熊女)와 유화(柳花)는 영웅을 낳은 생물학적 모성(母性)에 머물지 않는다. 그들은 구질서를 깨고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가능케 한 결정적 주체, 즉 ‘국가의 어머니’로서 등장한다. 그러나 역사가 흐르며 이들의 서사는 대개 남성 영웅의 탄생을 수식하는 부차적 존재로 격하되기도 하였으며, 여성의 독자적인 주체성 또한 그 틀 안에서 제한적으로만 허용되었다. 결국 고대의 기록들은 여성의 신성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철저히 남성 중심적 서사의 하위 체계로 배치하는 이중적 태도를 견지해 왔다.
이런 맥락에서 ‘국신’은 단순한 권력의 상징을 넘어 공동체의 기원을 정당화하고 신성화하는 핵심 기제였다. 특히 ‘시조모(始祖母)’라는 존재는 공동체의 탄생과 그 정통성을 최종적으로 승인하는 상징적 구심점으로 기능해 왔다. 국가는 비록 제도와 권력이라는 가시적인 형태로 유지될지언정, 그 심원한 뿌리만큼은 ‘여성적 형상’이라는 서사적 토대 위에 세워져 있었음을 조상들은 익히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격변 속에서 이러한 여성적 신성은 본연의 형상을 온전히 지켜내지 못했다. 유교적 가치 체계가 공고해짐에 따라, 국가 기원의 주체였던 여성 신성은 점차 축소되고 변형되는 운명을 맞이한다. 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유교적 합리주의에 입각해 신화적 요소를 쳐내는 과정에서 여성 신성을 철저히 주변화했다. 반면 일연의 『삼국유사』는 파편화된 그 흔적들을 일부 보존하며 그 명맥을 잇게 했다. 이러한 기록의 차이는 여성 신성이 공식 역사의 무대에서 밀려나 민간 설화와 신앙의 심연으로 자리를 옮겨간 뼈아픈 이탈의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어머니’ 형상은 태초의 신성을 온전히 보존한 결과물이라기보다, 장구한 역사의 굴절을 거쳐 살아남은 상징의 조각들일 수 있다. 이는 국가의 기원을 설명하는 서사가 고착된 실재가 아니라, 시대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어 온 ‘문화적 해석의 장(場)’임을 시사한다. 한반도의 ‘어머니’ 서사는 국가의 기원을 증명하는 상징적 언어인 동시에, 역사의 거친 흐름 속에서 재배치되고 소외되었던 ‘여성 주체성’의 고귀한 흔적이다. 우리는 이 상징의 궤적을 통해 과거가 아닌, 새롭게 발굴되어야 할 여성 신성의 실체를 마주하게 된다.
◆ 성모(聖母)적 상징과 한민족 문화정체성의 심층
여성 신성에 깃든 상징체계는 단순한 ‘여성 숭배’의 차원을 넘어선다. 그것은 공동체가 스스로의 존재를 정의하고 세계를 이해해 온 고유한 방식이자 메커니즘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교육학자 제임스 뱅크스(James A. Banks)가 갈파했듯, 한 집단의 문화적 정체성은 고정된 혈통 그 자체보다 공동체가 어떤 가치를 끊임없이 이야기(Narrative)하고 무엇을 기억하느냐에 의해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웅녀와 유화로 대변되는 성모 서사는 단순한 고대 전설의 파편이 아니다. 이는 우리 공동체가 기원과 정체성을 구축하기 위해 수천 년간 전래되어 온 상징적 서사의 정수(精髓)다. 비록 이 서사들이 거대한 단일 신앙 체계로 집약되지는 못했을지라도, 신화와 구비 전승, 민속 신앙의 저변에 분산된 채 퇴적되어 우리 민족의 정신적 골격으로 기능해 온 것이다.
20세기 초, 식민지 지배 담론의 오리엔탈리즘에 맞서 우리 문화의 주체적 원형을 찾고자 했던 선각자들의 노력은 눈부셨다. 일제강점기 민속학자 이능화(李能和)가 1927년 발간한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가 대표적 사례이다. 그는 무속을 단순한 비문명적 미신이 아닌, 이 땅에서 자생한 ‘민족 종교’이자 우리 정신사의 독창성을 담은 보고(寶庫)로 격상시켰다. 방대한 문헌 고증을 통해 무속이 한국 종교의 근원과 정체를 밝히는 ‘종교사 백과사전’과 같은 가치를 지님을 증명해 낸 것이다.
이러한 여성적 신성의 실체는 근대 한국학의 개척자들에 의해 비로소 학술적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최남선은 그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을 통해 고대 동북아시아를 관통하는 ‘밝(光明)’ 사상의 핵심이 한반도에 보존되어 있음을 역설했다. 그가 그려낸 고대 사회의 영적 지도는 하늘 숭배와 공동체 질서가 하나로 어우러진 세계였으며, 그 유기적 결합의 중심에는 언제나 천인(天人)을 매개하는 성스로운 존재가 있었다.
이능화, 최남선 등은 우리의 무속 전통 속의 ‘무(巫)’가 단순한 주술적 행위를 넘어, 국가의 안녕과 공동체의 통합을 이끄는 중요한 구심점이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그 성스러운 가교의 주역이 ‘여성’이 압도적으로 많았던 데 있다. 한국인의 영성 깊숙한 곳에 국가를 지탱하는 정신적인 기둥으로서 여성적 신성이 얼마나 강인하게 뿌리 내리고 있었는지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최남선이 거시적인 문화적 담론으로 하늘과 땅의 결합을 논했다면, 이능화는 여성 사제의 생생한 역사를 통해 그 매개체가 여성 신성이었음으로 확증했다. 이들의 연구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우리는 자명한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 한반도의 고대 국가는 눈에 보이는 부성적 권력 이전에, 여성적 신성이라는 정교한 상징 체계 위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독특한 문화적 토양 위에서 ‘여성’의 형상은 단순히 자애로운 ‘모성’이라는 평면적 이미지로 환원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생명의 탄생과 부단한 재생, 그리고 차원을 넘나드는 전환의 에너지를 함축한 복합적 상징으로 기능해 왔다. 즉, 우리 역사 속의 ‘어머니’라는 표상은 개별 가정의 돌봄 경제를 넘어, 공동체가 생명의 영속성과 우주적 질서를 어떻게 이해하고 수용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고귀한 ‘상징적 언어’였던 셈이다.
그러나 이토록 찬란했던 여성적 신성은 역사의 굴절 속에서 그 원형을 온전히 지켜내지 못했다. 유교적 가부장 질서가 공고해짐에 따라 국가 기원의 주체였던 여성 신성은 축소되고 변형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유교적 합리주의의 칼날로 신화적 요소를 쳐내며 이를 철저히 주변화한 반면, 일연의 『삼국유사』는 그 파편화된 흔적들을 일부 보존하며 명맥을 잇게 했다. 이러한 기록의 간극은 여성 신성이 공식 역사의 무대에서 밀려나 민간 설화와 신앙의 심연으로 자리를 옮겨간 뼈아픈 이탈의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
따라서 한반도의 여성 신성 전통은 박제된 ‘신앙’ 체계라기보다, 시대별로 겹겹이 쌓인 ‘문화적 기억’의 층위로 이해해야 마땅하다. 그것은 경직된 제도적 교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되는 서사와 상징을 통해 우리 공동체의 내면에 흐르는 심층적 의미 구조에 가깝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최남선이 복원하고자 했던 무속 전통 역시 단순한 과거의 유산이 아니다. 그것은 한반도 문화의 유전자(DNA) 속에 각인된 여성적 주체성을 확인하는 결정적 단서다. 다만 이러한 전통을 특정 종교적 개념에 국한시키기보다, 우리 공동체가 여성이라는 주체를 어떻게 상상하고 그 신성을 해석해 왔는지 살피는 거대한 ‘상징적 토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 여신(女神)문화가 배양 된 신라의 문화적 토양
신라 역사에서 등장하는 세 명의 여왕은 결코 우연에 기댄 정치적 예외 상태가 아니었다. 신라 여왕의 등장은 남성 권력의 일시적 공백이 빚어낸 우연이라기보다, 신라 사회가 장구하게 축적해 온 상징 구조와 한반도 고유의 정치 질서가 교차하며 표출된 의미있는 사건이다. 신라 지역은 고대부터 대지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산신(山神)과 지모신(地母神) 전통이 어느 지역보다 강고하게 유지된 영적 토양을 기반으로 한다.
이곳에 불교가 수용되면서 여성 또한 성불(成佛)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보편적 평등사상으로 발전됐고, 이런 사상적 토대 속에 여성 신성은 제도권에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이러한 종교적·문화적 함양 속에서 여성을 단순한 가계 계승의 도구가 아닌, 신성과 직접 연결된 거룩한 존재로 인식하는 사회적 합의가 이뤄졌다.
이처럼 비옥한 문화적 토양 위에서 신라의 세 여왕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특히 제27대 선덕여왕은 천문에 대한 깊은 통찰과 영민한 예지력으로 국가적 위기를 타개하며 왕권의 신성한 정당성을 확보했다. 최근 신라사 연구자들은 선덕여왕의 리더십을 ‘삼국통일의 실질적 설계자’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한다. 당시 비주류였던 가야계 김유신과 신진 세력 김춘추에게 파격적인 기회를 부여하고 그들이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거대한 장(場)을 열어준 것은, 갈등을 조율하고 잠재력을 끌어내는 선덕여왕 특유의 ‘모성적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는 결코 남성 중심의 강권적 힘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통합의 정치였으며, 여성의 통치가 정교한 질서 속에서 국가의 명운을 바꿀 수 있음을 증명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어 제28대 진덕여왕은 탁월한 외교술과 과감한 제도 정비를 통해 선왕이 닦아놓은 왕권의 안정기를 구가하며, 여성 군주 체제가 결코 일시적인 예외가 아님을 역사에 각인시켰다. 비록 제51대 진성여왕이 국가적 혼란기 속에서 통치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으나, 그의 존재 역시 여성 통치가 일회성 실험을 넘어 엄연한 제도적 현실이자 역사적 실체로 존재했음을 웅변한다. 이들 세 여왕의 계보는 한반도 고유의 여성 신성이 권력의 핵심부에서 어떻게 정치적 생명력을 얻고 발현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선명한 궤적이다.
이 세 명의 여왕은 공통적으로, 여성이 단순한 추상적 상징에 머물지 않고 실제적인 통치 주체로 기능할 수 있었던 구체적 조건이 신라 사회에 존재했음을 웅변한다. 여성 신성에 대한 문화적 기억이 곧바로 정치 권력으로 치환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으나, 그러한 상징적 구조가 여성 통치에 대한 사회적 수용성을 넓히고 정당성을 부여하는 심리적 토대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기서 간과해서는 안 될 지점은, 이러한 역사적 현상을 신화적 층위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웅녀나 유화 같은 존재들이 공동체의 시원(始原)을 설명하는 ‘상징적 서사’라면, 신라의 여왕들은 엄연한 제도와 권력의 메커니즘 속에서 명운을 건 사투를 벌였던 ‘역사적 인물’들이다. 즉, 신화가 공동체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뿌리’라면, 여왕들의 통치는 그 뿌리로부터 양분을 얻어 역사라는 지상(地上) 위에 피워낸 ‘실체적인 꽃’인 셈이다. 이 둘은 서로 다른 층위에서 상호작용하며 한반도 여성 신성의 맥락을 이어왔다
신라는 산신·지모신(地母神) 전통과 불교 수용 이후의 여성 성불 사상 등 다양한 층위에서 여성성과 신성을 결합해온 사회였다. 여신적 상징은 민간 신앙에만 머물지 않고, 국가 제의와 왕권 정당성의 언어와도 접속했다. 국가가 위기를 맞을 때, 공동체는 기존 질서를 반복하기보다 더 깊은 상징 질서로 스스로를 재정렬한다. 신라에서 여왕은 단지 통치자가 아니라, 신성 질서를 국가 차원에서 재배치한 존재였다. 결국 고조선의 웅녀에서 시작된 국신 전통, 부여와 고구려의 시조모 서사, 그리고 신라의 여왕 탄생은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진다.
결론적으로 신라 여왕의 등장을 ‘여성 신성의 직접적 계승’으로만 치부하기엔 무리가 있다. 오히려 그것은 유구한 시간 동안 축적된 상징적 기억이 특정한 역사적 기류와 맞물려 지상(地上)의 질서로 제한적으로 구현된 사례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한반도의 역사에서 반복적으로 호출되는 ‘여성’의 형상은 단순히 희생적인 모성이라는 틀에 갇히지 않는다. 대신에 공동체가 절박한 위기에 직면했을 때 새로운 질서를 창출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해 온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상징체계로 해석해야 한다.
신라의 세 여왕은 여성 신성에 대한 집단적 기억이 역사라는 무대 위에서 어떻게 변주되고 재배치될 수 있는지를 증명한 결정적 장면이다. 그들의 통치는 과거와의 완전한 결별도, 단순한 복제도 아니었다. 상징적 영성과 현실적 제도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피어난 독특한 역사적 현상이었다. 이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본질적인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 공동체의 심층에 면면히 흐르는 이 강렬한 상징적 기억은 한낱 과거의 유물로 박제될 것인가, 아니면 대전환의 시대를 맞이한 오늘날 새로운 존재와 서사를 통해 다시금 찬란하게 부활할 것인가.
고기훈 박사(한국학)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