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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란의얇은소설] 그때, 그리고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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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다 문득 생각나는 ‘그때’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기억
오늘 역시 반짝이는 날 되겠지
보잘것없어 보이는 삶도 소중

올가 토카르추크 ‘나이트(‘여러 개의 북을 두드리다’에 수록, 최성은 옮김, 은행나무)

201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을 읽을 때는 더 유심히 ‘서술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된다. 서술자, 즉 그 작품을 독자에게 들려주는 목소리.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소리에 따라 독자가 그 이야기나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는 작가이므로. 단편 ‘나이트’에는 인물이 딱 두 명 나오는데 역시 그녀와 그의 목소리가 순차적으로 혹은 동시에 나타난다. 그럼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은 두 사람의 다양하게 충돌하고 부딪히는 감정일 가능성이 커진다.

 

조경란 소설가
조경란 소설가

젊은 이 부부는 여름이면 늘 묵곤 하는 바닷가의 펜션에 이 박 일정으로 왔다. 그런데 지금은 겨울이다. 부부에게 무슨 일이 있나? 궁금해지지만 명확한 이유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레나타라는 이름의 반려견에게 그는 예전과 달리 짜증을 내고 그녀는 “시간이 어딘가 잘못되어간다는 생각”을 한다. 둘 사이가 ‘그때’에는 리듬도 있고 다채로운 문양으로 얽힌 직물과 같았는데 ‘지금’은 거칠고 모나 났으며 서로 말이 없다고. 그래서 두 사람은 어색해지고 공백을 메꿔야 할 땐 서로에게 대화를 시작하는 만트라가 된 “기억나? 그때…”를 꺼내 든다. 기억나? 그때 춤을 춘 것, 일주일 동안이나 체스를 둔 것. 두 사람을 한자리에 불러 모을 수 있는 그 말을.

아마도 어떤 노력을 해보고자 이 펜션에 온 듯한 그들은 같이 요리하고 저녁을 먹은 후 선반에서 찾아낸 체스판을 꺼내 예전 같이 체스를 둔다. 그는 늘 그렇듯 검은 말을 쥐고, 그녀는 흰 말을. 제대로 집중도 되지 않고 딱히 승부에도 관심 없는 채로. 그리고 그들은 침대 시트를 바꾸는, 아침에 바닷가를 산책할 때 사진작가인 남편이 아내에게 카메라를 마치 권총처럼 겨누듯 사진을 찍는, 레나테를 다루는 일로 싸운다. 화, 분노, 불쾌함, 우울함. 그런데 그 감정들만 솟구치는 건 아니다. 아내는 파란 체크무늬 셔츠를 입은 남편의 가슴에 불쑥 얼굴을 파묻고 싶어지고 남편은 행복했던 몇 달 전의 휴가가 떠오른 데 낯섦을 느낀다.

이틀째 저녁에 그들은 다시 체스를 두려고 한다. 그런데 흰 나이트 한 개가 없어졌다. 두 인물의 감정의 변화 외에 드디어 소설에서 무슨 일인가가 벌어진 셈이다. 쓸모없어진 듯 보이는 체스판에 변화가 생길까. 또는 그때처럼 신선하고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 지금은 형제 같고 고통의 동반자이며 위험과 역경을 함께 겪는 동지처럼만 느껴지는 두 사람의 감정에. 자주 달라지는 서술자 덕분에 독자는 서로가 모르는 시선을 보고 알게 된다. 그녀는 그가 오직 사진을 찍을 때만 살아 있는 듯 보고, 그는 그녀가 자신을 언제나 소년으로 취급해 언제 상처를 줄지 알 수 없다고 여긴다는 것을.

레나테가 입에 뭔가를 물고 낑낑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온다. 개의 입을 벌리고 그걸 끄집어내자 두 사람은 놀라워한다. 갖고 있던 체스 세트와는 다르나 더 기품 있고 작은 수제품의 흰 나이트. 그들은 그것을 한참 바라본다. 아침에 산책할 때 그녀는 지금은 잃어버린 듯한, 자신들이 행복했던 순간을 떠올렸었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들고 오는 가방 속에는 단 한 번만 쓸 수 있는 것들이 들어 있다”라고. 그 불꽃놀이같이 반짝거리던 순간이 지금은 사라졌다고.

곧 떠나야 하는데도 그들은 체스판에 다시 마주 앉았다. 잃어버린 흰 나이트 하나를 반려견이 바다에서 물고 온 일은 거의 신비에 가까워 보인다. 가끔 인생에는 그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나. 그러나 삶은 신비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새로 갖게 된 말을 체스판에 올려두자 게임을 할 수 있게는 됐지만 어딘가 이질적으로 보이듯. 그때와 지금, 이 절묘하게 스치고 포개지고 얽히는 현재. 언젠가 그들은 기억나? 그때, 라고 오늘에 대해 말하게 되리라. 그 지금, 오늘 역시 우리가 세상에 태어날 때 들고 오는 가방에서 나온 반짝이는 시간이라 믿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 순간순간이 보잘것없어 보이는 삶을 이루는 가장 큰 물질이라고.

 

조경란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