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전력 모드 인간이 회식을 견디는 방식은 생각을 멈추는 것이다.”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유미의 세포들 시즌3’ 남자 주인공 ‘순록’은 회식 자리에서 멍한 표정으로 이같이 생각한다. 지난 5일 종영한 유미의 세포들 시즌3가 OTT플랫폼 티빙 주간 콘텐츠 순위에서 4주 연속 종합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가운데, 배우 김재원이 연기한 순록도 온라인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한때는 적극적이고 주도적인 남성상이 로맨스 드라마의 공식처럼 소비됐으나 최근에는 순록처럼 조용한 ‘집돌이’ 캐릭터가 인기를 끄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저전력 모드 인간’으로 소개되는 순록은 사람들을 만날 때 쉽게 기가 빨리는 낯가림 많은 성격의 인물이다. 회사에서는 늘 정장을 갖춰 입고 감정을 크게 드러내지 않지만, 집에 돌아오면 헝클어진 머리에 편한 티셔츠 차림으로 활력을 되찾는 내향성이 두드러진 ‘대문자 I’인 것이다. 이러한 설정에 온라인에서는 “역시 집돌이 안정형 남자를 만나야 행복한 건가”, “(순록은) 좋은 남편감이다. 집돌이에 감정 기복 적고 성실하고 착하다” 등의 긍정적인 반응이 이어졌다.
◆구준표에서 순록으로…달라진 남성상
과거 로맨스 드라마에서는 적극적이고 직진하는 남성 캐릭터가 주류로 소비됐다. ‘꽃보다 남자’ 속 ‘구준표’처럼 거침없이 감정을 표현하거나, ‘태양의 후예’ 속 ‘유시진’처럼 능동적이고 자신감 넘치는 캐릭터가 대표적이다. 좋아하는 상대에게 과감하게 먼저 다가가는 남자의 모습이 일종의 설렘 공식처럼 여겨졌다.
최근 드라마에서는 달라진 분위기가 감지된다. 감정을 과하게 드러내기보다는 조용히 상대를 챙기고, 말수는 적지만 섬세한 태도로 관계를 쌓아가는 남성 캐릭터들이 인기를 끈다.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보다 안정적이고 다정한 성격이 시청자들에게 더 매력적인 요소로 소비되고 있는 셈이다.
지난해 화제작이었던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속 ‘양관식’ 캐릭터가 비슷한 예다. 배우 박보검이 연기한 양관식은 ‘무쇠’처럼 묵묵하게 일하고 가족만 바라보는 인물이다. 겉으로 감정을 크게 표현하지 않지만 가족을 위해 헌신하는 역할로 시청자들의 호응을 얻었다. 화려하거나 자극적이지 않아도 묵직한 안정감을 주는 모습이 인상적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tvN에서 방영한 ‘선재 업고 튀어’의 남자 주인공 ‘선재’도 섬세하면서도 숙맥인 캐릭터다. 배우 변우석이 맡은 선재 역은 처음부터 감정을 저돌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멀리서 조용히 마음을 쌓아가는 서사를 보여줬다. 드라마 역할 소개에서는 선재에 대해 “여자애 얼굴 한번 보겠다고 영화도 안 보면서 그 애가 있는 비디오 가게 앞을 매일 서성댄다”, “정작 눈이라도 마주치면 말 한마디 못 하고 도망 나온다”고 설명한다. 초반부터 적극적으로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혼자 속앓이하는 모습이다.
드라마 속 내향형 캐릭터 열풍은 최근 내향인 콘텐츠가 긍정적인 공감을 얻는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와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어릴 때부터 유난히 내성적이었던 아이’, ‘내향인 특징: 약속 나가기 귀찮지만 막상 나가면 누구보다 잘 논다’, ‘내향인이 혼자 있고 싶다는 신호’, ‘대문자 I가 집 가고 싶은 상황’ 같은 이른바 ‘내향인 밈(meme)’이 꾸준히 확산하고 있다.
◆사회 진출 늘어난 여성들…드라마 속 남성상도 바뀌었다
전문가들은 최근 내향적인 남성 캐릭터의 인기는 변화한 시대적 분위기가 반영된 결과라고 분석한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기존에는 남성이 내향적이면 소극적이거나 답답하다는 부정적인 시선을 받는 경우가 많았고 외향적이어야 한다는 강박도 존재해 ‘순록’ 같은 캐릭터들이 상대적으로 덜 부각됐다”며 “하지만 최근에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과 주체적인 여성상이 확대되면서 강하게 이끄는 남성상보다 옆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고 서포트해주는 남성 캐릭터를 선호하는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최근 드라마에서 남성 비서 캐릭터가 등장하는 것도 이런 변화와 연결된다”며 “이른바 ‘에겐남’, ‘두부상’ 같은 키워드가 주목받는 현상 역시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한 남성상을 선호하는 분위기를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