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선수는 오랜 시간 침묵 속에 머물러야 했다. 훈련 중 반복되는 폭언과 신체 접촉이 있었지만, 문제를 제기하는 순간 돌아온 것은 “팀 분위기를 해친다”는 말과 함께 이어지는 배제였다. 숙소 생활과 합숙 훈련이 이어지는 구조 속에서 선수는 지도자와 매일 마주해야 했고, 대회 출전과 선수 생활 전반이 지도자 평가에 연결된 환경에서 문제 제기는 곧 불이익의 위험으로 이어졌다. 지도자와 팀, 조직이 얽힌 구조 속에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범위는 사실상 제한적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11월, 이러한 상황을 바꾸는 제도가 도입됐다. 스포츠윤리센터는 신고자의 신원을 보호하기 위해 실명 대신 별도의 식별 체계를 사용하는 ‘가명 조사 체계’를 도입했다. 실명이 아닌 ‘가명’으로 조사를 요청할 수 있게 되면서 A 선수는 처음으로 신고를 선택했다. 이름이 지워진 자리에서, 그동안 침묵으로 남아 있던 경험들은 데이터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18일 스포츠윤리센터에 따르면 2025년 접수된 인권 침해 및 비리 신고는 총 1536건으로 집계됐다. 이는 전년 대비 80.5% 급증한 수치다. 단순 상담 건수 역시 6597건으로 69.3% 증가했다. 사건 평균 처리 기간은 152일에서 122일로 약 19.7% 단축됐다. 이 세 지표는 서로 다른 방향의 변화를 동시에 보여준다. 신고와 상담이 급증하는 동안 처리 기간은 줄었지만, 그 간극은 결국 ‘폭력의 표면화 속도’와 ‘행정 대응 속도’의 차이를 드러낸다.
◆‘격려’로 포장된 몹쓸 짓…가명 뒤에서 드러난 ‘침묵’
상담과 신고 급증의 배경에는 지난해 11월 도입된 ‘가명 조사 체계’가 있다. 실명 노출에 따른 보복 위험을 줄이기 위한 장치가 마련되면서, 기존에는 드러나지 않던 문제 제기들이 통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상담 6597건은 신고 1536건의 약 4.3배에 달한다. 이는 공식 신고로 이어지지 않은 단계에서 문제 경험이 광범위하게 축적돼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 가명 제도를 통해 드러난 사례들에는 일정한 패턴이 반복된다. 미성년 선수에 대한 신체 접촉은 ‘격려’나 ‘체력 강화’로 포장된다. 폭언과 과도한 체벌, 합숙소 내 통제는 ‘훈련 문화’라는 이름으로 묵인되는 일이 적지 않다. 문제를 제기하면 팀 내 배제나 대회 출전 제한 같은 보복이 이어진다. 개인의 경험처럼 보였던 사건들이 사실상 동일한 구조 위에서 반복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1536건이라는 수치는 새로운 일탈 행위의 급증이라기보다, 기존 구조적 폭력이 비로소 ‘기록 가능한 형태’로 전환된 결과로 해석된다. 상담 6597건 역시 신고 이전 단계에서 문제 제기와 갈등이 반복적으로 축적돼 있었음을 보여주는 ‘선행 지표’로 읽힌다.
◆‘신고’는 열렸지만, ‘분리’는 없었다…122일 가해자와 ‘같은 공간의 공포’
문제는 신고 시스템이 열렸음에도 이를 수용하고 처리하는 행정 시스템의 구조적 한계가 여전히 남아 있다는 점이다. 사건 평균 처리 기간은 152일에서 122일로 약 19.7% 단축됐지만, 이 변화는 현장의 안전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엘리트 스포츠 구조에서는 신고 이후에도 훈련과 대회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동일 공간에 머무는 상황 역시 그대로 유지된다.
결국 ‘처리 기간 122일’은 행정 속도 개선을 보여주는 수치라기보다, 피해자·가해자 분리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구조적 공백을 드러내는 ‘역설적 지표’로 읽힌다.
체육계 일각에서는 122일의 조사 기간에도 선수들이 기존 팀 일정에 그대로 참여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지적한다. 가해자와 같은 공간에 머문 상태에서 조사가 이어지는 만큼, 피해자에게는 이 기간이 단축된 행정 수치와는 별개로 훨씬 길게 체감될 수밖에 없다.
결국 이 122일은 단순한 행정 지연을 넘어, 1536건의 신고 이후에도 피해자와 가해자의 분리가 이뤄지지 않는 ‘구조적 시간’이다.
◆80% 폭증의 ‘역설’…체육계 폭력은 사라진 적이 없다
신고 80.5% 증가와 상담 69.3% 증가는 체육계 행정 시스템의 대응 구조를 그대로 보여준다. 스포츠윤리센터는 올해 청소년·여성 성폭력 사건 대응 강화를 위해 전담 특별조사팀을 신설했지만, 폭증하는 신고와 상담 증가 속도를 감당하기에는 여전히 인력과 보호 체계가 부족하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핵심은 사건의 규모가 아니라 데이터의 성격이다. 이번 수치는 범죄 자체의 급증이라기보다, ‘가명제 도입’ 이후 기존에 묻혀 있던 문제 제기가 비로소 표면화된 결과에 가깝다.
엘리트 스포츠는 오랫동안 지도자 중심의 위계 구조 속에서 운영돼 왔다. 그 안에서 문제 제기는 곧 선수의 불이익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가명 제도는 이 구조에 균열을 낸 장치로 평가되지만, 동시에 그동안 누적된 문제의 규모가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체육계 폭력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드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가명 조사 도입 이후 비로소 ‘기록되는 형태’로 전환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신고 이후에도 피해자가 기존 구조 안에 머물 수밖에 없는 현실은 바뀌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