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계 카메라가 주로 코트 위를 비추기 때문에 2025~2026시즌 도로공사의 경기를 직관하러 간 팬이 아니라면 보기 힘들었을 장면이 있다. 매 경기 어떤 선수가 웜업존에서 경기 진행 중에도 수시로 무릎 사이에 고무 튜브를 끼고 스쿼트 자세로 좌로 우로 앞뒤로 움직이면서 몸을 푸는 장면을.
해당 선수의 역할은 외국인 아포짓 스파이커의 뒤를 받치는 토종 아포짓 스파이커. 언제 투입될지 모른다. 경기에 한 번도 투입되지 않을 때도 있다. 투입되더라도 원포인트 블로커나 원포인트 서버 역할 혹은 세트 승패가 갈린 상황에서 외인 주전 선수의 체력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그 짧은 순간을 위해 그 선수는 그렇게도 열심히 몸을 풀었다. 언제든 코트에 섰을 때 자신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을 발휘하기 위해서.
코트 위에 서는 어느 한 순간에라도 최선을 다 하고 싶었던 그 선수가 이제 정든 코트를 떠난다. 2005 V리그 원년에 신인 드래프트 전체 2순위로 흥국생명(2005∼2010)의 지명 받아 현대건설(2010∼2025)를 거쳐 도로공사까지 22시즌을 코트를 지켜왔던 ‘영원한 꽃사슴’ 황연주(40) 얘기다.
1m77의 단신 아포짓 스파이커지만, 빠른 스텝과 폭발적인 점프력을 앞세워 전성기 땐 팀 시스템을 바꿔놓았고, 우승 반지도 6개나 보유하고 있다. V리그 남녀부 통틀어 5000득점도 가장 먼저 돌파하며 ‘기록의 여왕’이란 별명도 있었다. 통산 득점 5868점으로 전체 3위에 461개의 서브득점은 여전히 여자부 전체 1위다.
황연주의 은퇴 소식이 전해진 18일 오전 본 기자와 연락이 닿았고, 40여분간 은퇴를 결심하게 된 배경과 향후 계획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사실 황연주가 은퇴를 고민한건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2010~2011시즌부터 2024~2024시즌까지 15시즌을 뛰었던 현대건설에서 은퇴 제의를 받았을 때도 은퇴 생각을 했지만, 그만두더라도 자신의 결정으로 그만두겠다는 마음으로 도로공사로 이적했던 황연주였다.
도로공사가 정규리그 우승을 확정지었던 지난 3월13일 인천 흥국생명전을 마치고 만났을 때도 “현역 연장과 은퇴 사이에서 고민이 많다.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챔프전을 마치고 진지하게 고민해보겠다”던 그였다.
챔프전을 마치고 은퇴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져 있던 황연주였지만, 도로공사 프런트에서는 황연주가 선수단 내에서 끼치는 무형의 가치를 높게 샀다. V리그 여자부 최연장자로서 솔선수범하는 모습은 물론 코트 위에서도 여전히 백업 아포짓 스파이커로는 황연주만한 선수가 없다는 판단이었다. 배유나의 현대건설로의 이적으로 인해 베테랑 자원들이 더 적어진 도로공사로선 황연주의 존재가 선수단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큰 역할이었을테다.
그러나 현장에서의 판단은 프런트와는 다소 달랐다. 김종민 전 감독의 ‘경질 아닌 경질’ 이후 도로공사 현장의 리더십은 아직 제대로 정해진 게 없다. 직무대행 체제로 이어지고 있는 도로공사 사장으로 새 인물이 오면 지금의 배구단 체제가 바뀔 가능성도 농후하다. 이런 상황에서 코트 위 현장에선 황연주에 대한 차기 시즌의 롤을 제대로 부여해주지 못했다. 아니 않았다.
현장과 프런트 간의 괴리된 시각의 시간은 꽤 길게 흘렀다. 결국 이런 상황이 길어지자 황연주는 “내 발로 나가는 게 맞겠다 싶었다. 현역 연장이냐, 은퇴냐 사이에서 빨리 결정을 내려야 나도 다음 계획을 세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내가 고민하고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때 내려놓는 게 맞다는 결론이었다”라고 설명했다.
‘후회가 남지 않느냐, 목소리에는 후회가 덕지덕지 붙은 것 같다’라는 질문에 황연주는 “운동을 더는 못한다는 것에 후회는 없지만, 그냥 마무리가 조금 아쉽다는 거, 그거 빼고는 후회가 없어요. 내가 코트 위에서 평생 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은퇴의 시간이 가까워졌다는 건 모두가 알았으니까요”라면서 “제가 1년 더 한다한들 내년에도 이 고민을 또 했어야했겠다, 이런 생각도 드네요”라고 답했다.
공을 내려놓은 황연주는 모처럼 휴식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프로농구 부산 KCC의 전력분석원으로 일하고 있는 남편 박경상도 2025~2026시즌을 우승이라는 결과를 받아들었다. 황연주는 “오랫동안 못 쉬었으니까 푹 쉬고 있어요. 남편이랑 여행도 다녀오려고 계획하고 있고요”라고 답했다.
향후 계획도 아직은 물음표다. 지도자나 해설위원 등 배구의 끈을 놓지 않겠다는 막연한 생각만 갖고 있다. 5~6년 전부터 스포츠 전문 채널로부터 해설 제의가 은근히 들어왔던 바 있다. ‘워낙 말을 잘 하니 해설위원 제의도 올 것 같다’라고 묻자 “기회나 제의가 온다면 정말 감사한 마음으로 할 수도 있죠”라고 답했다.
언젠가는 코트 위에서 선수들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도 있다. 황연주는 “어릴 땐 지도자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아예 없었는데, 나이를 들고 보니 이런저런 것을 바꿔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리고 요 몇 년 간은 웜업존에서 주로 경기를 지켜보다보니 선수가 아닌 지도자의 마음으로 경기를 분석하면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전성기 시절엔 코트에서 원없이 뛰었고, 선수 말년엔 백업으로도 뛰었으니 주전과 백업의 마음을 모두 아우를 수 있을 것 같다”라고 답했다.
선수 생활을 오래 하느라 미뤄뒀던 2세 계획도 있다. “솔직히 많이 늦었다”라는 황연주에게 남편 박경상은 아내를 먼저 배려해주는 멋진 배우자였다. 황연주는 “프로에서만 22년 뛰었던 제게 배구를 내려놓고 바로 한 아이의 엄마로 살면 너무 힘들 것 같다고, 바로 2세를 갖자고 하는 게 마음이 아프다고 남편이 이야기하더라고요. 그래서 1년 정도는 편하게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쉬라고 얘기해주더라고요”라고 일화를 들려줬다. 이어 “선수 말년에 이런저런 마음 고생을 하던 저를 위해 제가 부당한 일을 당했을 때 먼저 화내주던 남편이에요. ‘당신은 진짜 대단한 선수다. 그리고 선수를 그만두면 더 잘 될 거다’라고 예쁘게 말해줘요. 정말 고맙죠”라고 덧붙였다.

